신약 연구자가 치료 효과가 있을 법한 후보물질을 만들면 먼저 생쥐 같은 동물이나 사람 세포를 이용해 실험을 한다. 여기서 약효와 안전성이 입증되면 비로소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머지않아 처음부터 사람에게 바로 약물을 시험할 수 있게 됐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칩 위에 사람의 세포로 만든 초소형 장기들을 모두 집어넣은 '휴먼온어칩(Human on a chip·칩 위의 사람)' 덕분. 신약개발 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환자의 세포로 만든 칩을 이용하면 그 환자에게 가장 잘 맞는 약을 골라낼 수도 있다. 환자 맞춤형 치료제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인체를 가로세로 3㎝ 칩 하나에 구현

"옆으로 기울여서 보세요. 회로들이 희미하게 보이죠? 간과 대장암세포, 골수세포를 혈관으로 연결해 놓은 모양입니다."

지난 22일 홍익대 화학공학과 연구실에서 성종환 교수가 건넨 가로, 세로 3㎝ 크기의 휴먼온어칩은 두 겹의 투명한 플라스틱 판 사이에 검은색의 네모난 금속판이 끼워진 모양이었다. 햇빛에 비춰보니 검은색 평면 안에 그려진 육각형 3개와 이들을 연결한 복잡한 회로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육각형은 각각 간·대장암세포·골수세포이고, 회로는 이들을 연결한 혈관들이다. 이 칩은 대장암 치료제를 인체에 직접 투여했을 때의 효과를 실험해볼 수 있다. 대장암 치료제는 간에서 해독작용을 한 번 거친 후 혈관을 통해 암세포로 전달된다. 또 골수세포를 죽이는 부작용도 있다. 성 교수는 "그 모든 과정을 이 작은 칩 하나로 미리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휴먼온어칩을 사용하면 개인 맞춤형 의약품도 만들 수 있다. 대장암 치료제에는 '항암성분'과 더불어 '보호성분'이라는 것도 들어 있다. 보호성분은 항암성분이 암세포에 도달하기 전에 간에서 파괴되는 것을 막는 물질. 현재 시판 중인 대장암 치료제는 쥐 실험을 토대로 항암성분과 보호성분을 1:4 비율로 섞었다. 사람마다 간의 기능이 조금씩 다른데 이를 고려하지 못한 것.

성 교수는 휴먼온어칩으로 두 가지 성분의 배합 비율을 바꿔가며 실험한 결과 쥐 실험과 다른 비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결과는 지난해 국제학술지 '랩온어칩(Lab on a chip)'에 게재됐다. 지금은 항암제의 인체 흡수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간·위·소장·신장을 하나의 칩에 올리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개별 장기 모방한 칩들도 나와

네덜란드 그로닝겐대학 그루트휘스 교수팀은 지난해 인체에서 얻은 간과 폐 조직을 이용해 휴먼온어칩을 만들고, 약물의 효과와 독성을 동시에 알아보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피사대학 연구진은 최근 간과 혈관, 지방 세포를 하나의 칩 위에 얹어 이들의 상호작용을 알아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휴먼온어칩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다. 전문가들은 장기를 한 가지씩 칩 위에 구현하는 연구들이 활발해지면 이들을 하나로 묶은 휴먼온어칩도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하버드대학 도널드 잉버 교수팀은 지난해 '사이언스'에 허파꽈리에서 얻은 작은 세포들로 '렁온어칩(Lung on a chip·칩 위의 허파)'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세포를 배양접시에서 키우면 몸 안에 있을 때와 다른 형태로 자란다. 여기에 독성물질을 시험하면 인체 내부에서의 반응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잉버 교수는 렁온어칩은 허파의 수축과 이완 과정까지 모방했기 때문에 독성 물질에 대한 반응을 실제 허파와 거의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서갑양 교수팀은 올 초 국제학술지 '통합생물학(Integrative Biology)'에서 칩 위에 신장 세뇨관을 만들어 오줌이 흐르는 과정을 구현했다고 발표했다. 서울대 전누리 교수팀은 칩 위에서 신경세포의 손상과 회복과정을 관찰했다.

성 교수는 "초소형 장기들을 휴먼온어칩에 통합하려면 이들을 연결하는 혈관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약을 먹으면 위에서 흡수되는 데 30분가량 걸리고, 간에서의 해독 과정은 수 분이면 끝난다. 칩의 인공 혈관(회로)에서 약물이 흘러가는 속도도 이것과 비슷하게 만들어야 인체에서 시험하는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