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외국'이라 불리는 이태원(梨泰院). 오래전부터 다문화 본거지였던 이태원은 용산 미군 기지 이전(2015년 예정)과 한남뉴타운 재개발(2009년 착수)로 인해 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땅값 상승으로 외국인 집단 주거지로서 위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갤러리와 명품 숍이 들어서면서 서울 시내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이태원을 역사적, 공간적으로 입체 조명한 '이태원:공간과 삶'이란 백서를 처음 내놓았다. 변혁을 앞둔 이태원에 대해 지난해 6개월간 현장 조사를 거치고 현재 사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인터뷰해 이곳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외국인들에게 '서울은 몰라도 이태원은 알아야 한다(You may not know Seoul, but you should know Itaewon)'고 알려진 이태원. 서울시에서 벌이는 불량 주택지에 대한 개발과 이태원 외국인 문화 젖줄 노릇을 했던 용산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떠나면 이태원도 점차 '한국화'할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 전망이다.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에 늘어선 각양각색 상점들. 미군들 해방구로 불렸던 이태원은 점차 다국적 문화 집산지로 변모했다.

◆왜 이태원인가

이태원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이 근처에 '배(梨)밭'이 많다고 해서 나왔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여인들을 범하면서 태어난 아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 이 일대고, 그래서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이타인(異他人)'. 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부녀자, 이른바 '환향녀(還鄕女)'들이 정착한 곳도 이태원이란 말도 있다. 이태원이 오래전부터 타국 풍속이 섞이는 지대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용산 기지에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고, 해방 후 용산기지에 미 8군이 주둔하면서 이태원은 외국 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유흥·환락가로 성장

1960년대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은 지금 남산 3호 터널 입구에서 이태원 입구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주민 이임전(75)씨는 "대개 지방에서 올라왔지 이태원 사람이 양색시 된 거는 없어"라고 했다. 1962년 이른바 '양공주'가 9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경찰이 공식 집계한 일도 있다.

'양공주'는 미군을 상대로 달러를 벌어들일 뿐 아니라 미군 PX 물품을 반출해 파는 창구이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미아리·청량리·천호동 등 다른 집창촌이 융성하고, 강남이나 홍대 앞 클럽이 번창하면서 이태원은 명성을 잃어갔다.

여전히 이태원 소방서 뒤편으로 짙게 유리창을 도배한 '청소년 출입금지' 구역 '후커힐'이 일부 있지만 규모는 미미하다. '후커힐' 부근 주택가 사이에는 트랜스젠더와 게이들이 모이는 '게이힐'이 있다. 대담하게 성적 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임을 써 붙인 주점이 적지 않다.

◆미군 거리에서 다국적 거리로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이태원 안에서는 인종차별이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고 하며, 아직도 비공식적으로 백인 전용 클럽이 있다고 지역주민들은 전한다.

미군 일색이던 이태원이 다국적 거리로 변모한 것은 1993년 이후다. 정부에서 외국인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하면서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이 이태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보광동과 한남동, 이태원 2동 부근 낡은 주택들은 임대료도 싸고, "외국인들이 많아 불편한 시선도 피할 수 있고, 외국인들이 주인의식을 느낄 수 있어 안정감을 맛보는 공간"이라는 게 역사박물관의 설명이다.

1979년 생긴 이태원 이슬람사원은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 노동자들에게 성지(聖地) 역할을 했다. 이 근처에서는 히잡을 쓰고 긴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나 터번을 쓴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슬람 거리'로 통하는 이유다.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살람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정진희(여·41)씨는 "(이슬람교도들이 꺼리는) 돼지고기 성분을 제거하고 제품을 만든다"고 했다. 해밀톤호텔 건너편 이화시장 골목에는 아프리카인들이 자주 보여 '아프리카 거리'로 불린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음식점들도 총천연색이다. 파라과이 음식점 '꼬메도르', 멕시코 '타코칠리칠리', 태국 '타이가든', 터키 '술탄케밥' 등 다양한 나라 음식 문화가 이태원 거리 속에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