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호 발사는 1992년 한국이 우주개발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었다. 국내 우주 탐사 역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뉜다. 위성 개발, 자체 발사체 개발, 우주센터 건립이다. 나로호 발사는 이 중 가장 어려운 자체 발사체 개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시도였다.

국내 우주개발 사업의 여정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우주개발의 첫발을 디딘 것은 1992년 8월. 실험용 과학 위성인 '우리별 1호'를 발사한 시점이다. 세 분야 중 그나마 진입이 가장 쉬운 분야인 인공위성 개발로 우주 개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자체 기술이 없어 영국 서리(Surrey)대학에서 영국 연구진의 기술을 하나하나 배워야만 했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원들이 직접 영국을 방문, 기술을 습득했다. 위성 개발 초기 단계이다 보니 거의 해외 기술로 제작돼 '우리별'이 아니라 '너네별 1호'라는 자조적인 별명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이후 우리별 2호, 3호를 거쳐 2003년 과학기술위성 1호에 이르기까지 국내 우주개발 사업은 발전을 거듭해 기술 자립도를 계속 높였다. 민간분야에서도 무궁화위성 1호가 1995년 처음으로 발사됐고, 이어서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1호, 2호가 각각 1999년과 2006년 발사됐다. 이 과정에서 국내 위성 제작기술의 자립도는 위성에 따라 70~90%까지 올라갔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부는 1996년 우주개발 중장기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우주 개발사업을 위성 개발, 발사체 개발, 기타 연구개발과 국제협력 등 분야마다 체계적으로 추진키로 한 것이다. 특히 발사체 개발은 국제적인 기술 이전이 엄격히 제한돼 장기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분야다. 우리별 1호가 유럽의 '아리안 4' 발사체를 이용한 이래, 국내 모든 위성은 타국의 발사체로 발사됐다.

자체 위성 발사체 개발은 1993년 1단형 고체추진 과학로켓(KSR-I)이 개발되면서 공식적으로 첫발을 디뎠다. 이후 1997년 KSR-II(중형과학로켓), 2002년 KSR-Ⅲ(액체추진 과학로켓)이 개발됐다. 그러나 가장 장거리를 비행한 KSR-Ⅱ조차 고도 137.2㎞, 비행거리 123.9㎞에 그쳐 우주에 위성을 띄우기에는 현저히 모자라는 수준이었다. 이번 나로호의 목표궤도는 고도 306㎞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먼저 2000년 전남 고흥에 나로우주센터를 착공했다. '배'를 띄우기 전 배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항구' 착공에 나선 것. 나로우주센터는 발사대와 발사지휘센터, 기상관측소, 종합조립동, 추적레이더 등 발사체를 발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첨단 시설을 갖췄다. 예산만 해도 3000여억원이 소요됐고, 8년6개월이 걸려 올 6월에 완공됐다. 우주센터를 갖춘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러시아·중국 등 13개국에 불과하다.

이번 나로호가 발사에 성공했더라면 명실상부한 '우주강국' 대열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러나 결국 나로호에 탑재된 위성이 정상궤도 진입에 실패하면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