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외과 수술실. 엉덩이 관절 일부를 드러내고 인공 조형물을 끼워 넣는 수술이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뼈를 잘라내는 수술에서는 의사는 팔짱을 낀 채 모니터만 바라보면 된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수술로봇 '로보닥(ROBODOC)'이 드릴로 뼈를 잘라내는 일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련한 외과의사라도 끌과 망치로 뼈를 깎으면 일부 뼈가 손상된다. 그러나 로보닥은 레이저로 표시된 부분만 정확히 잘라낸다. 덕분에 로봇 시술을 받은 환자는 외과의사가 집도한 것보다 훨씬 회복 속도가 빠르다.

로보닥은 내시경 외과수술 로봇인 다빈치와 더불어 세계 2대 의료용 로봇으로 꼽힌다. 1990년 미국 IBM에서 분사한 ISS(Integrated Surgical Systems)가 개발했다가 FDA 승인에 계속 실패하면서 사장 위기에 처했다. 이를 국내 중소기업이 되살려 한대당 20억원이 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든 것이다.

엉덩이·무릎 관절 수술 로봇인 로보닥의 원천 기술을 인수한 큐렉소의 김태훈 회장(왼쪽)과 이경훈 사장(가운데)이 안양 평촌 본사에서 로보닥을 점검하고 있다.

미국에서 버려진 기술 사들여

2005년 큐렉소의 김태훈 회장은 매물로 나온 유망 기술목록을 훑어보다가 로보닥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미 로보닥에 대한 찬사를 여러 번 접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문매체가 로보닥을 가장 탁월한 의료 기술로 평가한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로보닥의 제조사인 ISS가 헐값에 나왔으니 믿을 수 없었지요."

당시 ISS는 유럽, 일본 등에 50여대의 로보닥을 팔았지만 미국 본토에서는 FDA 승인을 못 받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ISS의 재무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채권자들이 새 인수자 물색에 나선 것.

큐렉소 이경훈 사장은 ISS 인수에 앞서 로보닥의 FDA 승인이 가능한지 확인하려고 2006년 상반기 내내 워싱턴에 머무르며 관련 전문가들을 물색했다. 힘들게 만난 의료 전문 변호사는 "FDA에 '시판 전 승인(PMA·PreMarket Approval)'으로 신청하지 말고 '시판 전 신고(510k)'로 바꾸라"고 조언했다. PMA는 최초의 의료 기술이 신청하는 분야이고 510k는 기존의 기술과 유사한 사례에 허가를 내주는 분야인데, 510k로 신청하면 승인 가능성이 크다는 것.

큐렉소 경영진은 1년 반의 탐색 끝에 ISS 인수를 결정했다. 2007년 8월, ISS 주주총회를 통해 로보닥의 원천 기술이 이전되면서 한국은 단번에 의료 로봇 강국으로 올라섰다.

IBM과의 특허 분쟁서도 승리

회사는 FDA에 로보닥의 승인을 다시 신청했다. FDA는 5개 병원에서 130번의 임상 시험을 요구했다. 회사는 일본 두 군데, 미국 세 군데 병원을 섭외해 인수 대금과 맞먹는 130억원을 임상시험에 투자했다. 중소기업으로선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인수 직후 미국 투자회사가 인수 금액의 두 배를 주겠다며 되팔라는 제의까지 해온 터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 못 한 악재(惡材)가 발목을 잡았다. IBM이 ISS가 자사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며 6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60억원)의 기술 사용료를 요구한 것. 김 회장은 "당시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 측은 양측의 특허 수만건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IBM도 로보닥의 특허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특허분쟁은 지루한 협상 끝에 큐렉소가 20만달러(약 2억원)를 IBM에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큐렉소는 동시에 IBM이 보유한 4만여건의 각종 특허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도 얻었다.

마침내 지난해 8월 FDA에서 한 장의 팩스가 도착했다. 로보닥의 승인 확인서였다. 수술용 자동로봇으로는 로보닥이 FDA의 첫 번째 승인이었다. 김 회장은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부품 국산화도 추진

큐렉소는 2020년까지 유효한 로보닥 원천 특허를 갖고 있다. 올해 미국 공장을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새크라멘토에서 실리콘밸리로 확장 이전했다. 의료 로봇 시장은 2006년 7억 400만달러에서 연평균 31%씩 커져 2011년에는 28억달러(약 3조3600억원)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김 회장은 "척추 수술 등 다른 수술로도 로보닥의 사용 대상을 넓힐 수 있다"며 "로보닥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 국산화도 관련 기업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