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 사업이 이번에는 환율 암초를 만났다. 전 세계적인 인공지능(AI) 칩 확보 경쟁 속에 GPU(그래픽처리장치)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미 1년 이상 늦어진 사업이 재차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등에 따르면, 작년 11월 입찰 공고를 할 예정이었던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 사업은 아직 입찰 공고를 하지 않고 있다. 이달 중에 입찰 공고가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과학기술계에서는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기 힘들다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올해부터 가동을 시작해야 했다. 정부는 2022년에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에 2929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시스템성능 600PF, 저장공간 200PB, 네트워크 대역폭 400Gbps으로 전 세계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GPU 가격 급등이 발목을 잡았다. 챗GPT 등장과 함께 전 세계에서 AI 기술개발이 경쟁적으로 진행됐고, 핵심 자원인 GPU 가격도 급등했다. 2022년 예비타당성조사 당시 책정한 예산으로는 급등한 GPU 가격을 맞출 수가 없었다. 여섯 차례에 걸친 입찰 공고에 단 하나의 기업도 응찰하지 않아 모두 유찰됐다. 과기정통부와 재정 당국인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예비타당성조사 적정성 재검토를 진행해 예산을 4483억원으로 53% 늘렸다. 올해 안에 GPU 공급 계약을 맺고 내년 초에는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를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6호기 도입이 늦어지는 사이 5호기는 가동률이 포화 상태에 달했다. 성능도 문제다. 5호기는 구축 당시에 전 세계에서 성능이 14위로 제법 높았지만, 작년 6월 기준으로는 75위까지 떨어졌다. 정부가 예타 적정성 재검토까지 하면서 6호기 도입을 서두른 이유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은 6호기 예산 확대를 발표하면서 “인공지능 등의 우리나라 글로벌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초고성능컴퓨팅 인프라 수요가 급상승하고 있다”며 “이에 핵심 인프라인 슈퍼컴 6호기를 신속하게 도입해 새로운 과학기술 발견과 연구개발 혁신 그리고 산업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율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예타 적정성 재검토를 거쳐서 새로 책정한 6호기 예산은 관련 법에 따라 조사 직전 해인 2023년 평균 환율을 기준으로 잡았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305.41원이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환율이 급등하면서 지금은 1450원대까지 올랐다. GPU는 모두 해외 업체가 공급하기 때문에 달러 환율을 기준으로 구매해야 하는데, 2023년 환율을 기준으로 책정한 예산으로 제대로 GPU를 구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6호기에는 모두 8800장의 GPU가 들어간다. 엔비디아의 주력 GPU인 H100이 장당 3만5000달러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모두 3억800만달러다. 현재 환율을 기준으로 하면 4490억3320만원에 달한다. 2023년 평균 환율로는 4020억6628만원이다. 차액이 470억원으로 10%가 넘게 차이가 난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다. 예타 적정성 재검토 당시 정부는 4개 업체에서 GPU 견적을 받았다. 정부는 2023년 환율인 1305.41원을 기준으로 재산출가를 냈는데, 4개 업체는 견적을 새로 낸 지난해 환율을 적용해 견적가를 냈다. 4개 업체가 적용한 환율은 1373~1389.7원이었다. 정부는 환율 차이로 인해 정부가 계산한 재산출가가 업체들의 견적가보다 낮았다고 밝혔다.
슈퍼컴퓨터 유지·보수 비용도 문제다. 6호기의 경우 첫 1년은 무상으로 유지·보수가 이뤄지지만 이후 4년 동안은 유상으로 유지·보수를 해야 한다. 정부는 전체 금액의 연 6% 수준으로 유지·보수 비용을 책정했다. 유지·보수비는 대금 지급 시점의 환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환율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총사업비도 오를 수밖에 없다.
환율로 인한 리스크가 크지만,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 사업에는 환율 변동에 대한 별도의 안전 장치가 없다. 정부가 작성한 예타 적정성 재검토 보고서에는 “슈퍼컴퓨터 6호기는 국내 생산·공급이 되지 않는 외산 제품으로 환율 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스템 도입을 위한 환율변동 대응은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나온다. 환율이 급등했다고 예타를 거쳐 책정한 예산을 늘리거나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한 한 국내 기업 관계자는 “국가 슈퍼컴퓨터 도입 사업은 과거에도 환율이 오르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아는데, 외산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사업에서 환율 변동에 대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가 어렵다”며 “전 세계가 고성능 AI 칩을 구하기 위해 ‘쩐의 전쟁’을 펼치고 있는데 지금 배정된 예산으로 H100 8800장을 구매하는 게 쉬워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