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푸른뱀의 해인 을사년(乙巳年)이다. 뱀은 전 세계 신화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동물이다. 기독교에서 뱀은 악마인 사탄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상징하며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막에서 꽃피운 문명인 이집트는 혼돈과 파괴의 신 ‘아펩(아포피스)’이 뱀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남미 신화에서는 뱀을 다산과 땅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문화권마다 뱀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만 전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뱀을 공통적으로 중요한 상징으로 보고 있다. 뱀이 기후와 환경에 관계 없이 여러 문화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뱀은 초원지대와 정글, 사막, 심지어 강과 바다에서도 살고 있다. 그만큼 뱀이 다양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난 현장서 구조 앞장서는 뱀 로봇
뱀은 파충류에 속하는 동물로 도마뱀과는 가까운 친척이지만 앞다리와 뒷다리가 모두 퇴화해 길고 가느다란 몸통만 남아 있는 독특한 외형을 갖고 있다. 평범한 동물이라면 다리 없이 적자생존의 야생에서 쉽게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뱀은 대부분 소형 동물에게 두려운 포식자로 자리 잡고 있다. 몸통 만으로도 재빠르게 이동하며 나무도 손쉽게 오를 수 있는 뱀의 이동 능력 덕분이다.
뱀의 놀라운 적응력에 주목한 과학자들이 있다. 바로 로봇공학자들이다. 로봇공학자들은 뱀을 모방한 생체모방공학(Biomimetics) 기술을 적용한 로봇으로 인명 구조, 군사 정찰 용도에 사용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뱀의 독특한 외형은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나 개를 닮은 사족보행 로봇이 할 수 없는 임무도 가능하게 한다.
윤동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로봇공학과 교수는 “기존 로봇은 이동성을 높이기 위해 다리의 크기를 키워야 하지만, 뱀을 모방하면 몸통 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어 좁고 깊은 곳을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며 “똬리를 틀어 나무 같은 원통형 구조물을 오를 수 있다는 점도 강점”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 연구진은 2021년 한국로봇융합연구원과 함께 재난·구조 현장용 뱀 모방 로봇을 개발했다. 건물이 붕괴하거나 지진으로 사람들이 매몰된 상황에서 뱀 모방 로봇은 잔해 틈 사이로 들어가 실종자를 찾아 구조를 도울 수 있다. 관절은 모터로 연결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어 좁은 공간에서도 쉽게 움직일 수 있다. 머리 끝에는 물통이나 약물을 주사할 수 있는 바늘이 있어 응급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처치도 가능하게 했다.
윤 교수는 “뱀 모방 로봇은 앞이 막혀 있더라도 머리를 들어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 재난 구조 현장에 특화돼 있다”고 소개했다.
해외 연구진들도 국내 연구진의 로봇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20m 길이의 뱀 모방 로봇 ‘로보아(RoBoa)’를 공개했다. 로보아는 모터 대신 공기 압력을 이용하는 ‘공압’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ETH 연구진은 재난 현장은 물론 도심 하수도 상태를 살펴보는 용도로 로보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무 기어오르고, 몸에도 붙이는 뱀 모방 공학
로봇공학자들은 뱀 모방 로봇이 인명구조뿐 아니라 군사용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가령 나무 몸통을 감고 꼭대기에 올라 먼 거리에 있는 적진을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조용한 움직임으로 몰래 숨어들어 대화를 엿 듣는 것도 가능하다.
윤 교수는 “뱀은 풀숲이나 정글, 모래바닥은 물론 물 속에서도 움직이는 능력을 갖고 있다”며 “뱀을 모방한 수륙양용 로봇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연구진은 2010년 뱀 모방 로봇 ‘엉클샘(Uncle Sam)’이 나무를 오르는 모습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영상 속 엉클샘은 몸통으로 나무를 감싸 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엉클샘은 땅에서는 꿈틀거리며 이동할 수 있으면서 나무를 감싸 안거나 원통형 파이프 내부를 기어 올라갈 수 있어 어떤 로봇보다도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뱀을 모방한 기술은 로봇에 그치지 않는다.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뱀의 몸통을 따라하면 웨어러블(착용형) 장치에도 단단한 배터리를 사용할 수 있다. 한국기계연구원 연구진은 2021년 8월 뱀을 모방한 배터리를 선보였다. 뱀의 비늘처럼 배터리를 만들어 부드럽게 휘어지면서도 늘어날 수 있는 형태다. 배터리 자체를 유연하게 만들지 않더라도 구조를 바꾼 것만으로도 유연한 배터리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현승민 기계연 책임연구원은 “기존 배터리는 휘어지거나 늘어나면 부서져 움직임이 많은 곳에는 활용도가 떨어진다”며 “뱀의 유연한 몸통을 덮고 있는 비늘처럼 배터리를 쌓으면 어느 방향으로든 펼쳐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뱀 비늘 모방 배터리를 웨어러블 장치에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령 신체 능력을 보조하는 외골격 슈트를 작동하려면 배터리가 필요한데, 기존 배터리는 신축성이 없어 부착할 수 있는 위치와 크기가 제한적이다. 뱀 비늘 모방 배터리는 움직임이 많은 다리, 팔 부위에도 사용할 수 있어 웨어러블 장치의 무게는 줄이면서도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현 책임연구원은 “완전히 자유자재로 변형 가능한 형태로, 어떤 웨어러블 장치에도 사용할 수 있다”며 “지금은 배터리 자체가 늘어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지만, 섬유 산업계에서 뱀 비늘 모방 배터리 기술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IEEE Explore(2021), DOI: 10.1109/RoboSoft51838.2021.9479192
Soft Robotics(2022), DOI: https://doi.org/10.1089/soro.2020.0175
Robotics and Autonomous Systems(2012), DOI: https://doi.org/10.1016/j.robot.2011.08.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