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공간에서 뇌를 연구하면 우리의 감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AI)과 결합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는 것은 물론 신체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죠.”
지난달 30일 스위스 로잔에서 만난 마틴 쉬림프 로잔 연방공대(EPFL) 교수는 신경과학과 컴퓨터과학을 결합해 가상의 뇌인 ‘인 실리코(in silico)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다. 인 실리코는 라틴어로 컴퓨터 칩에 쓰이는 실리콘 안에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뇌이다.
쉬림프 교수는 전 세계 연구소에서 수집한 인간과 영장류의 뇌 활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디지털 뇌를 만들었다. 가상의 신경세포와 시냅스(신경세포 연결부)를 컴퓨터에 구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뇌 연산과 같은 방식의 활동이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눈으로 시각 정보가 들어왔을 때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연산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뇌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 AI와도 차이가 있다. 쉬림프 교수는 “AI가 인간을 뛰어넘는 정교한 연산을 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디지털 뇌는 실제 사람이 하는 실수나 착각까지도 닮아야 한다”며 “연산 과정을 알 수 없는 ‘블랙박스’인 AI와 달리 알고리즘 구조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도 디지털 뇌의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디지털 뇌 프로젝트의 목표는 총 세 가지”라고 했다. 먼저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지능을 모사한 AI 모델을 개발하며, 마지막으로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뇌 자극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쉬림프 교수는 디지털 뇌를 이용하면 근본적으로 신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신경이 손상되면서 일어나는 신체 장애는 지금까지도 완치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으로 여겨진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신경을 재생하는 치료법이 주목 받기도 했으나, 상용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쉬림프 교수 연구진은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2021년 디지털 뇌를 이용해 인간의 언어 처리 능력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언어는 인간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자 복잡한 뇌 활동을 요구하는 능력이다. 연구진이 개발한 디지털 뇌는 사람들이 대화할 때 나타나는 뇌 활동을 100%의 정확도로 예측했다. 이전까지 뇌 활동 모사 정확도가 30~50% 수준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월등한 수치다.
그는 “이번 연구는 언어 장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뇌 자극술, 뇌-기계 인터페이스(BCI) 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며 “디지털 뇌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이용해 자극에 따른 뇌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면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쉬림프 교수의 최종 목표는 디지털 뇌를 이용해 시각 장애 환자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뇌에서 나온 신경신호를 컴퓨터에서 해독해 그에 맞는 전기신호를 근육에 전달하는 BCI 방식으로 마비 환자의 몸을 움직인 사례는 이미 있지만, 시각 장애를 치료한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는 “디지털 뇌 연구를 하던 중 언어 능력과 시각 능력이 뇌 활동 측면에서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냈다”며 “치료법이 없는 시각 장애 환자를 위한 치료법을 찾는 데 디지털 뇌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뇌의 활용 범위는 신경공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모델이 더욱 정교해지면 신경전달 물질과 분자 단위의 상호작용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같은 뇌질환을 치료할 의약품 개발을 위한 시뮬레이션(가상실험) 도구로 디지털 뇌를 활용할 수 있다.
쉬림프 교수는 “디지털 뇌가 지금 수준은 인간의 모든 신경 시스템을 상세히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머지않아 앞으로 분자 수준까지 다룰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제약 산업에도 디지털 뇌가 활용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뇌를 그대로 재현해 불치병 환자를 위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라며 “우리의 연구가 시각 장애, 언어 장애, 우울증,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뇌질환의 해결법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