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이 운영하고 있는 양성자가속기실 내부. 양성자가속기는 양성자를 빠르게 가속하는 장비다. 길이는 75m에 이른다./경주=이병철 기자

지난 7일 경북 경주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의 양성자가속기실. 두께가 2m를 넘는 차폐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대한 지하터널이 나타났다. 밖엔 찬 바람이 불었지만, 내부는 마치 한여름처럼 더운 열기로 가득했다.

양성자가속기실은 원자핵을 이루는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다른 물질과 충돌시키는 실험을 한다. 가속기의 시작점인 이온원에서 양성자가 나오면 가속기 내부 75m를 이동하며 점차 속도를 높이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표적과 충돌한다. 그러면 표적 물질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특성을 나타내거나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 양성자가속기가 기초물리학 연구부터 산업기술까지 다양한 연구에 필요한 이유다.

이재상 원자력연 양성자과학연구단장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려면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들의 특성을 연구해야 한다”며 “최근에는 반도체, 우주 산업에서도 양성자가속기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양성자가속기실로 들어가는 차폐문. 방사선 누출을 막기 위해 두께가 2m에 달한다./경주=이병철 기자

양성자과학연구단은 2017년부터 반도체, 우주부품을 위한 저선량 양성자빔 실험을 하고 있다. 양성자가속기에서 나온 방사선을 부품에 쏘고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확인한다. 이는 우주방사선에 반도체나 우주부품이 손상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다.

우주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지구로 쏟아진다. 강한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와 중성자가 대표적이다. 우주방사선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진 않지만 전자·기계 장치에는 문제를 일으킨다. 반도체가 우주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오류를 일으키는 ‘소프트 에러’가 대표적이다.

기업들은 화물 운송 수단과 일정을 까다롭게 정하는 것도 우주방사선 때문이다. 이 단장은 “반도체를 수출할 때 고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항공기를 이용하면 배로 운송하는 것보다 13~18배 많은 우주방사선의 영향을 받는다”며 “실제로 반도체 기업들은 우주 환경을 고려해 운송 날짜와 항로를 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전에 사선 검사를 하는 것도 우주방사선 때문이다. 반도체를 생산할 때는 없었던 불량이 우주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생길 수 있다. 우주방사선에 대한 내구성을 검증하려면 실제 우주로 제품을 보내면 된다. 지상에서 실험하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양성자가속기는 자연적으로는 10년이 걸릴 실험을 단 하루에 끝낼 수 있다.

우주 방사선에 의한 영향을 실험하는 'TR-102'실. 실제 우주환경에서는 10년이 걸릴 실험을 단 하루에 끝낼 수 있다./경주=이병철 기자

우주방사선 실험이 이뤄지는 TR102실도 양성자가속기실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차폐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다. 양성자가속기에서 양성자가 빠른 속도로 다른 원소와 충돌할 때 나오는 중성자를 끌어와 반도체와 기계부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우주방사선 중 (+) 전하를 가진 양성자는 대부분 극지방에 떨어져 반도체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다. 반면 중성자는 지구 전역에 떨어지는 만큼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우주산업이 발전하면서 우주부품 실험 수요도 늘고 있다. 인공위성이나 우주발사체, 우주탐사장비는 지구보다 더 강한 우주방사선을 맞는 만큼 방사선 실험이 중요하다.

문제는 국내에 방사선 실험을 할 곳이 이곳밖에 없어 기업들의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단장은 “우주방사선 환경 실험이 가능한 곳은 국내에서 양성자과학연구단이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20곳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성자가속기 이용 경쟁률은 2017년 1.37대1에서 올해 상반기 4.17대1로 3배 넘게 늘었다.

기업이 사용할 수 있는 양성자가속기 이용 시기는 1년에 120일 정도에 불과하다. 이 중 46%는 반도체 연구에 쓰이고 있다. 시험 대상은 대부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제품이다. 기업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기에는 의료용 동위원소 생산, 전력반도체 효율 개선, 문화재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실험과 시설 정비가 이뤄진다.

이 단장은 “반도체 기업과 우주 기업이 신청한 양성자가속기 이용 신청은 하루 8시간 운영 기준으로는 200일치가 넘어 모든 요청을 들어주기 어렵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양성자과학연구단은 수출을 위해 필요한 실험 수요가 늘면서 하루 운영시간을 8시간에서 24시간으로 전환했다. 지난 8월부터 시범 운영으로 문제점을 파악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24시간 운영에 들어간다. 한국이 수출산업을 위해 24시간 내내 지상에 우주환경을 구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