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년에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100억개가 넘고 사람보다 더 많아질 겁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9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에서 가진 화상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휴머노이드는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걷고 두 팔로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이다. 그가 던진 화두는 저출산과 휴머노이드였다. 머스크 CEO는 “세계적인 저출산 추세로 인구가 급감할 것”이라며 “사람이 빈 자리를 인공지능(AI) 기술 기반의 휴머노이드가 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가 머스크 CEO의 전망에 귀를 기울인 것은 테슬라가 가장 앞선 휴머노이드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2021년 휴머노이드 개발 소식을 전한 뒤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작년 9월 휴머노이드 ‘옵티머스’ 시제품을 깜짝 공개했다. 옵티머스는 손가락과 팔,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였고, 요가를 비롯해 다양한 동작을 선보였다.
시간이 흘러 지난달에는 테슬라의 로보택시 공개 행사장에 옵티머스 여러 대가 등장해 참가자들에게 음료와 팝콘을 나눠주기도 했다. 테슬라는 내년에 옵티머스를 실제 공장에 배치하고, 2026년에는 상업 생산에 나서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휴머노이드가 사람보다 많아지는 건 2040년에나 가능하겠지만, 사람을 대신해 공장에서 일하고 물과 음식을 내오기는 불과 1, 2년 뒤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공장엔 로봇 팔 대신 인간형 로봇 필요
한국은 산업용 로봇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다. 근로자 1만명 당 로봇 보급대수를 의미하는 로봇 집적도가 932대로 한국이 세계 1위다. 전 세계 평균의 7.3배에 달한다. 이런 산업용 로봇은 로봇 팔이나 자율주행·물류로봇 같은 것들이다. 생산 현장의 자동화를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 10월 23일 대구 엑스코(EXCO)에서 열린 ‘2024 미래혁신기술박람회(FIX 2024)’와 25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4 로보월드’는 휴머노이드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 휴머노이드 기술력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휴머노이드 전문가인 한재권 한양대 로봇공학과 교수 겸 에이로봇 최고기술책임자(CTO)는 FIX 2024에서 “결국에는 사람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학습하면서 다양한 임무를 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가 제조 현장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하나의 임무만 하던 기존 산업용 로봇과 달리 휴머노이드는 학습을 통해 수십, 수백 가지 임무를 할 수 있다”며 “단순 작업을 반복하기만 하는 산업용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휴머노이드가 필수”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인 데니스 홍(홍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 겸 로멜라(RoMeLa·로봇메커니즘연구소) 소장도 대구에서 같은 의견을 냈다. 홍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래에 로봇과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살기 위해서는 로봇도 사람의 형태여야 한다”며 “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많은 도구를 로봇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휴머노이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구 엑스코에는 홍 교수가 이끄는 로멜라연구소가 자체 개발한 휴머노이드가 총출동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휴머노이드로 평가받는 아르테미스도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지난 7월 열린 ‘로보컵 2024′ 휴머노이드 어덜트(Humanoid Adult)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로보컵은 전 세계 연구진이 개발한 휴머노이드를 이용한 로봇 축구대회다. 이 대회에서 아르테미스는 6전 6승으로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홍 교수는 아르테미스가 공을 차는 동작을 시연하며 “아르테미스는 동물의 근육처럼 탄성이 있고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액추에이터(구동기)를 이용해 힘을 조절한다”며 “나중에는 파쿠르(다양한 장애물을 맨몸으로 넘는 스포츠)를 할 수 있게 성능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아르테미스는 사람과 공을 주고 받거나 사람과 비슷한 속도로 걷는 등 여러 가지 동작을 선보였다.
고양에서 열린 2024 로보월드의 에이로봇 부스에서는 휴머노이드 두 대가 실제 사탕 가게 같은 환경에서 동작을 선보였다. 빨강, 파랑, 노랑 세 가지 종류의 사탕 중에 사람이 한 가지 색의 사탕을 주문하자 안내 휴머노이드인 ‘에이미’가 쟁반을 들고 사탕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다른 휴머노이드 ‘앨리스’가 직접 스쿱(큰 숟가락)으로 사탕을 퍼서 종이컵에 담아 에이미가 가져 온 쟁반에 올렸다. 에이미는 다시 사람에게 쟁반에 담긴 종이컵을 전달했다.
앨리스는 사람처럼 종이컵을 챙겨서 사탕을 담은 뒤 쟁반에 올리는 모든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해 관심을 끌었다. 아르테미스가 공을 차거나 걷는 등 하체 움직임에 집중한 시연을 선보였다면 앨리스는 두 팔을 완벽하게 제어하면서 실제 사람과 같은 동작을 할 수 있는 것을 상체 시연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 교수는 “실제 사람이 사용하는 종이컵이나 스쿱 같은 도구를 휴머노이드가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서로 다른 로봇 두 대를 통해 로봇 간의 협업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목표”라고 말했다.
◇사람을 닮은 몸, 두뇌도 사람 따라 간다
미국 테슬라의 옵티머스는 실제 사람을 닮은 체형으로 눈길을 끌었다. 테슬라의 최신형인 2세대 옵티머스는 키 170㎝에 무게 63㎏으로 실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멜라연구소의 아르테미스도 마찬가지다. 아르테미스는 키 142㎝에 무게 38㎏으로 실제 사람보다는 조금 작다. 대신 이동 속도가 초속 2.1m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휴머노이드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홍 교수는 “아르테미스는 빨리 걷는 것뿐만 아니라 뛸 수도 있다”고 말했다. 로봇이 뛴다는 건 두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홍 교수는 “로봇 보행 기술의 끝판왕은 이족보행 로봇을 야외에서 안전장치 없이 걷게 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2주 마다 UCLA 캠퍼스에서 가지고 나가서 자갈밭이나 흙길을 걷게 하면서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K-휴머노이드의 대표 주자 격인 4세대 앨리스는 키 165㎝에 무게 40㎏으로 아르테미스보다 크다. 3세대 모델이 키 136㎝, 무게 20㎏ 정도로 작았지만, 이번 2024 로보월드에서 공개한 4세대 모델은 사이즈를 확 키웠다. 한 교수는 “3세대 모델은 실제 일을 하기에는 버거운 면이 있어, 4세대 모델은 성인 수준의 강력한 팔과 지탱할 수 있는 다리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공장이나 농장 같은 산업 현장에서 실제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휴머노이드의 몸뿐만 아니라 두뇌까지도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 휴머노이드 상용화 예상 시점이 빨라진 것도 지난 몇 년 간 AI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덕분이다. 액추에이터나 모터 같은 하드웨어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휴머노이드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두뇌 역할을 하는 AI가 필수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로봇의 인지와 판단, 제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기술에서 가장 앞서 있는 테슬라는 휴머노이드를 위한 생성형 AI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다른 휴머노이드 기업들도 저마다 AI 기업과 협업하면서 휴머노이드의 두뇌를 발전시키고 있다. 대한민국 1호 휴머노이드인 ‘휴보’를 만들었던 오준호 레인보우로보틱스 창업주는 지난달 11일 ‘디지털혁신페스타 2024′에서 강연을 통해 “여지껏 넘지 못했던 장벽이 있었는데 AI 기술의 발전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든다”며 “로봇을 원하는 시장의 요구에 따라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I 기술은 국내 휴머노이드 기업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재권 교수는 미국의 휴머노이드 개발 회사인 피겨AI가 오픈AI와의 협업을 통해 빠르게 휴머노이드 기술을 끌어올린 사례를 언급했다. 한 교수는 “로봇 플랫폼은 자신이 있지만 여기에 AI를 잘 얹어줄 수 있는 파트너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로봇용 AI를 연구하고 있거나 자체적인 AI 모델을 가진 기업들을 설득해서 함께 휴머노이드 개발을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렴한 가격 앞세운 중국의 침투 시작됐다
2024 로보월드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만든 휴머노이드도 첫선을 보였다. 중국의 휴머노이드 제조사인 유니트리가 만든 ‘G1′과 부스터 로보틱스의 휴머노이드였다. 이들 휴머노이드는 전시장을 두 발로 걸어다니며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모두 한국의 수입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중국 휴머노이드의 침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휴머노이드 기술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런 투자를 바탕으로 휴머노이드 기술력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중국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휴머노이드 ‘스타1(STAR1)’은 초당 3.6m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데니스 홍 교수의 아르테미스가 가진 기록을 깬 것이다. 홍 교수도 “아르테미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전기 구동 이족보행 로봇이지만, 최근 중국에서 우리보다 빠르게 걷는 로봇을 발표했다”며 “언젠가 우리를 능가하는 전기 구동 이족보행 로봇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높은 기술력만큼이나 저렴한 가격으로도 경쟁사들을 놀래키고 있다. 유니트리가 출시한 G1은 가격이 1만6000달러(약 2100만원)에 불과했다. 머스크 CEO가 휴머노이드가 일상화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가격이 2만달러 정도인 걸 감안하면 중국은 이미 가격을 상용화 수준까지 낮춘 것이다. 한 교수는 “실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유료 옵션을 추가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가격이 훨씬 높아지지만, 휴머노이드 시장에서 중국의 가격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아직까지는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을 놓치면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휴머노이드가 여러 제조 현장에서 활용되기 시작하면 문제가 더 커진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제조 현장의 노하우나 기업의 특허, 생산 전략 등이 휴머노이드를 통해 고스란히 데이터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중국산 휴머노이드가 우리 제조 현장을 장악하면 기술 탈취나 보안 같은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한 교수는 “미국보다도 중국의 휴머노이드가 우리에게 더 위협적”이라며 “중국이 가격 경쟁력으로 밀고 들어오면 국내 산업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