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고법 민사9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수많은 피해자를 낳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국가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수백 명이 죽고 잠재적 피해자만 2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참사’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던 2016년, 이승섭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교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삼성전자(005930) 직원들이었다. 삼성전자는 이 교수에게 살균제가 필요 없는 가습기를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연구를 제안했다. 지난 23일 KAIST 대전 캠퍼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당시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정식 계약은 하지 않고, 대신 연구실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연구를 해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기약이 없어 보였던 살균제가 필요 없는 가습기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인 이 교수가 8년 전 삼성전자의 요청으로 시작했던 연구가 결실을 맺고 있다. 이 교수는 연구실에서 직접 만든 가습기와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보여줬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제품과 다를 게 없었지만, 이 교수가 선보인 제품들은 필터 없이 얇은 필름 한 장으로 가습과 살균 같은 기능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삼성전자가 처음 찾아오고 1년 정도 지나서 실마리를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삼성전자의 해당 팀이 해체된 뒤였다”며 “연구를 진행한 학생이 프로젝트에 계속 열정을 보여서 기술 개발을 계속 진행했고, 마침내 지금의 수준까지 기술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정전분무 방식을 이용해 물방울을 만드는 것이다. 정전분무는 노즐을 통과하는 액체에 고전압을 걸어 전기를 띤 입자인 이온이 표면으로 이동하며 수십㎛(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크기의 미세한 물 덩어리로 변화하는 기술이다. 예컨대 주사기 바늘에 천천히 물을 흘리면 물방울은 표면장력에 의해 한 방울씩 떨어지지만, 정전분무 기술을 적용하면 물 분자들이 전기를 띠고 서로 밀어내며 수백만 개 이상의 작은 물방울들로 분사되는 식이다.
이렇게 정전분무 방식으로 분사된 물방울은 전기를 띠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미세 먼지를 붙잡는 효과가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해 해외에서는 일본의 파나소닉이 이미 공기청정기나 가습기를 만들었고 국내에서도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이 공기청정기 기술을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정전분무 방식은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물에 고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해로운 오존(O₃)이 생긴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자외선과 만나면 산소 원자 세 개로 이뤄진 오존이 생긴다. 오존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정전분무 방식을 이용한 가전 제품은 편리성과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교수는 “오존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낮은 전압으로 물을 정전분무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았다”며 “낮은 전압으로도 높은 전기장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우리 기술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연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교수가 개발한 정전분무 방식으로 만든 물방울의 성분을 자세히 분석했더니 물의 산소와 수소가 하나씩 결합한 수산기(水酸基, OH·)라는 성분이 검출됐다. 수산기는 인체에 무해하면서도 다양한 오염 물질을 강력하게 산화할 수 있는 물질이다.
이 교수는 “수산기가 함유된 물방울이 있으면 주변의 바이러스나 악취, 곰팡이까지 죽인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었다”며 “기존의 정전분무 방식으로 만드는 물에도 수산기가 함유돼 있지만 몸에 나쁜 오존이 있기 때문에 활용이 어려웠는데, 우리가 오존이 발생하지 않는 정전분무 기술을 확보하면서 수산기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산기를 이용한 정전분무 기술을 가습기에 적용하면 필터가 필요 없고, 당연히 살균제도 필요 없다. 이 교수는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1년이고 2년이고 가습기를 청소하지 않고도 계속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22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에이투어스(A2US)’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KAIST 교학부총장을 지낸 탓에 본격적인 사업에는 작년 10월부터 뛰어들었다. 올해 1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 2024에 참여했고, 내년 1월에도 휴대용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를 들고 CES 2025에 참석한다.
포항공과대학교기술지주를 비롯한 여러 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자)에서 초기 투자도 받았다. 이 교수는 국내외 기업 10여 군데와 제품 개발과 기술 제휴를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자의 가전 제품에 물 정전분무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이 교수를 찾아왔고, 중국의 가전회사인 하이얼도 이 교수와 협력하고 있다.
이 교수는 물 정전분무의 확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살균제 없는 가습기에서 시작한 연구지만 단순 가전을 넘어서서 다양한 산업 분야에 활용이 가능하다고 봤다. 실제로 가전과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분야의 기업들이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중공업이다. 이 교수는 “삼성중공업은 선박의 평형수를 정화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데 수산기를 활용하기 위해 우리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 같은 대형 유통 회사도 있다. 산화력이 강력한 수산기를 과일에 뿌리기만 해도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 교수는 “대형마트의 경우 판매하는 과일의 30%는 상해서 버린다고 하는데, 과일이 호흡하면서 발생하는 에틸렌 가스가 문제의 원인”이라며 “수산기는 에틸렌 가스를 흡수하기 때문에 과일의 빠른 숙성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함께 반도체 공정에서 발생하는 초미세입자를 없애는 데 수산기를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이 교수는 수산기를 함유한 물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여러 국내 기업과 협업을 통해 제품 상용화에도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 제품 개발 의뢰를 받았고, 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때 받은 숙제를 풀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도 있다”며 “우리 기술은 실생활에서 여러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자나 연구원들에게 늘 안전을 강조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