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 오전 포항에서 그래핀스퀘어 공장 착공식이 열렸다. 포항공대(포스텍), 포항시, 경상북도 경제진흥원 관계자가 참석했고, 그래핀 소재를 사용할 삼성전자와 LG전자, 일본 이토추 상사 등도 사람을 보내 공장 착공을 축하했다. 홍병희 그래핀스퀘어 대표(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이날 “그래핀은 과거 철이나 실리콘 소재가 그랬던 것처럼 산업 전반과 일상에 혁신을 불러올 것”이라며 “그래핀 밸리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첫 양산 공장”이라고 말했다.
탄소 원자들이 벌집처럼 연결된 판형 물질인 그래핀은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그래핀은 구리보다 100배 많은 전류를, 실리콘보다 100배 빠르게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소재다. 빛이 98% 통과할 정도로 투명하고 열 전도성도 높다. 강도는 강철의 200배다. 산업적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이 물질은 두께가 0.34㎚(나노미터·10억분의 1m)로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물질로도 불린다.
영국 맨체스터대의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는 2004년 투명 스카이테이프를 탄소로 구성된 흑연에 붙였다 떼내는 방법으로 그래핀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이 실험 하나로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 10일 ‘그래핀 20주년’ 특집 기사에서 “그래핀 개발은 과대포장의 시기를 지나고 상업적 적용이 가능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20년 그래핀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제 그래핀의 상용화가 시작되는 것일까.
◇노벨상 그리고 과대포장의 시대
그래핀은 탄소 원자로 이뤄진 나노 소재의 한 종류다. 탄소 원자들이 축구공 모양으로 연결된 풀러렌이 1985년에 가장 먼저 세상에 나타났고, 다발 형태로 말린 탄소나노튜브가 1991년, 그리고 판형 그래핀이 2004년에 등장했다.
탄소 나노 소재 삼형제 가운데 풀러렌 개발자들이 가장 먼저 1996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풀러렌은 이제 사라진 소재다. 정승열 한국전기연구원 나노융합연구센터장은 “풀러펜은 탄소 원자 60개로 이뤄진 축구공 모양의 동소체인데 응용이나 활용 측면에서 떨어지다 보니 지금은 사장됐다”고 말했다.
그래핀도 초기에는 풀러렌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러시아 태생의 두 물리학자가 흑연에서 그래핀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이후, 과학자들은 그래핀을 대량 생산할 방법을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과학자들은 2009년 화학적 기상 증착법(CVD)으로 대면적 그래핀 필름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CVD는 기판 위에 니켈을 얇게 입힌 뒤 섭씨 1000도의 고온에서 탄소를 고루 흡착시켜 니켈을 녹여내 고순도의 그래핀을 얻는 공법이다. 그래핀스퀘어의 홍병희 대표는 이 기술을 활용해 그래핀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핀 분야의 석학인 김필립 하버드대 교수의 제자인 홍 대표는 그래핀을 이용한 터치스크린 기술도 시연했다. 김필립 교수는 컬럼비아대에 있을 때 가임·노보셀로프와 거의 같은 시기 그래핀을 발견해 2010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면적 그래핀 필름 생산과 노벨상 수상이 연달아 발표되자 전 세계가 그래핀에 주목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2013년 10억 유로(약 1조4800억원)를 그래핀 생산과 개발에 투자하는 ‘그래핀 플래그십’을 발표했다. 지금도 유럽의 그래핀 개발의 중심 축이다. 영국은 그래펜으로 노벨상으로 받은 가임 교수가 있는 맨체스터대에 국립그래핀연구소를 세웠다. 중국도 ‘그래핀 굴기(崛起·우뚝 일어섬)’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당장이라도 그래핀이 세상을 바꿀 것 같았던 이 시기를 사이언스는 ‘과대 포장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기업들은 그래핀이 둘둘 마는 롤러블(rollable) TV나 우주 엘리베이터, 컴퓨터의 실리콘 칩을 대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중 실현된 건 없다. 가임 교수는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참여한 회사들은 대부분 과대 광고를 기반으로 했다”고 말했다.
그래핀은 기대와 달리 상용화가 쉽지 않았다. 홍 대표가 대면적 그래핀 필름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상용화 수준의 대량 생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여전히 대면적으로 만들기가 어려웠고,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 채 다른 형태로 가공하기도 어려웠다.
김상욱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대면적 그래핀을 합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합성 이후 원하는 기판으로 옮겨서 응용하는 과정에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했다”며 “10장을 만들어도 한두 장 쓰기도 힘든 상황이 되다 보니 응용이 늦어졌고, 이 문제 때문에 여전히 대면적 그래핀 기술은 수율이 낮고 가격이 비싸다”고 말했다.
◇성능 떨어져도 제품화 쉬운 형태에 주목
과학자들은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가 처음 흑연에서 분리한 순수한 그래핀 대신 현실에서 활용하기 쉬운 형태의 그래핀에 주목했다. 그래핀을 여러 층으로 쌓아 100㎚ 미만 두께의 판 형태로 만든 그래핀 나노플레이트나 다양한 형태의 제품으로 만들기 쉬운 그래핀 산화물이 등장했다.
이렇게 만든 그래핀 나노플레이트나 산화물은 순수한 형태의 그래핀보다 성능이 낮지만, 다른 재료와 섞어 새로운 특성을 갖거나 특정한 용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형태의 그래핀은 가전제품이나 콘크리트, 자동차, 뇌 삽입 장치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인브레인 뉴로일렉트로닉스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기술에 사용할 칩으로 금속 대신 그래핀을 이용했다. 금속으로 만든 칩보다 그래핀 칩이 가볍고 강하고 전기적 반응도 뛰어나 두뇌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글로벌 해운 선사들은 2022년부터 선체 코팅에 그래핀 필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독성 화합물 사용을 줄일 뿐 아니라 그래핀이 마찰을 줄여서 연료를 절약할 수 있었다. 중국의 화웨이는 휴대폰의 열 확산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그래핀을 쓰고 있다.
김상욱 교수는 “엄밀히 말하면 그래핀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산화 그래핀이나 그래핀 나노플레이트는 공정이 쉽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활용도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연구진은 산화 그래핀을 대량 생산하는 원천 특허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활용해서 그래핀 칫솔을 개발하기도 했다.
같은 방법으로 그래핀이 기능성 섬유가 될 수도 있다. 김 교수는 “산화 그래핀을 이용한 그래핀 섬유로 기능성 의류와 국방용 소재도 만들 계획”이라며 “그래핀을 소량만 넣어도 항균성이 높아지고 자외선 차단 같은 우수한 특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땀을 흘려도 세균이 생기지 않고,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아도 냄새가 나지 않는 섬유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정승열 전기연 나노융합연구센터장은 “그래핀이 우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배터리 음극을 들었다.
전기차인 포르쉐 타이칸은 배터리 음극에 실리콘을 탑재하는데 그 비율이 5~10%에 그친다. 에너지 밀도가 큰 실리콘 비율을 늘리고 싶지만, 실리콘 팽창 문제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 센터장은 “그래핀으로 보자기처럼 실리콘을 감싸면 실리콘 비율을 20%까지 높일 수 있다”며 “이런 식으로 그래핀을 따로 쓰기보다는 다른 소재를 보완하는 셰프의 킥(kick·결정적 한 수)처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홍병희 그래핀스퀘어 대표는 머지않은 시기에 대면적 그래핀 필름의 상용화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핀스퀘어가 지난 6월 포항에 착공한 공장이 그 중심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홍 대표는 “지금은 그래핀 기술이 성숙해서 상용화되기 직전이라고 보면 된다”며 “우리는 다른 소재와 경쟁하지 않고 그래핀만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생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하반기 포항 공장이 준공하면 본격적인 양산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홍 대표는 삼성전자, LG전자 같은 국내 대표 IT 기업들과 함께 그래핀이 들어간 제품을 조만간 선보이겠다고 했다. 홍 대표는 “지난 7월 삼성전자에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서 삼성전자형 그래핀을 개발하고 있다”며 “가전제품의 발열 부품으로 그래핀을 사용하는 상용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