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에 있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의 원전 시뮬레이터 내부 전경. 전면 벽면에는 원전 운영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상황판이 있으며, 책상의 콘솔을 이용해 원격 운영이 가능하다./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지난 6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건물에서 큰 소리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약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신호였다. 약한 지진은 원전 운영에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다음에 더 큰 지진이 올 수 있는 만큼 경보가 울리면 대응할 준비를 한다. 잠시 뒤 더 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건물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정보표시판에 일제히 경보 신호가 켜졌다. 한 눈에 봐도 위급 상황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날 경보는 모두 실제 상황이 아닌 훈련이었다. 윤경선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국제원자력안전학교 선임연구원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재현한 것”이라며 “원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상황을 모사해 대응 절차를 훈련할 수 있도록 구성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원전 사고에 대비해 미리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시뮬레이터(가상실험장치)를 운영하고 있다. 실제 원전을 제어하는 운영실과 완전히 같은 환경을 꾸며서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전 사고를 훈련한다. 2012년부터 개발에 착수해 2015년부터 운영했다. 원전 모델은 한국이 개발한 140만킬로와트(㎾)급 가압경수로인 APR-1400이다.

지난 2011년 위성이 촬영한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현장. 연기가 나는 것이 원전 3호기 외곽건물 폭발 현장이다. 후쿠시마 원전은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지진해일)로 인해 발전기가 정지되면서 발생한 사고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시뮬레이터를 이용하면 당시 사고 상황을 재현해 대응 절차를 훈련할 수 있다./조선DB

시뮬레이터에서는 원전 사고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원전 기능이 가상의 지진으로 상실되면 가장 먼저 발전량이 크게 줄었다. 당장 핵연료가 누출되는 중대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두면 중대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대비가 필요하다. 비상 정지까지 사고가 확산되지 않도록 전력을 복구하는 절차가 필요한 셈이다.

시뮬레이터에 있는 운전원 콘솔(단말기)은 원격으로 원전의 각 계통을 조정할 수 있다. 윤 선임연구원의 지도에 따라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전원에 연결하고, 발전기를 가동했다. 100여개에 달하는 계통 중 가동이 필요한 라인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 차근차근 진행하자 곧바로 전력이 회복됐다. 이후에는 안전 절차에 따라 안전정지를 하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준의 재난을 막을 수 있다.

디지털로 구성돼 있는 운전원 콘솔이 작동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아날로그 방식의 제어도 훈련할 수 있다. ‘안전제어반’이라고 불리는 장치는 모든 버튼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곳에서도 운전원 콘솔과 마찬가지로 원전의 기능을 제어할 수 있다.

이날 시뮬레이터 체험은 약 10분에 걸쳐서 진행됐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는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절차를 반복해 숙달하는 교육이 이뤄진다. 윤 선임연구원은 “실제로는 비상발전기 가동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비상발전차량도 운영하고 있다”며 “이외에도 냉각제 상실, 증기 발생기 튜브 누출 같은 다양한 사고 상황에 대한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시뮬레이터 건물 전경./대전=이병철 기자

원자력안전기술원은 원자력안전규제원 양성을 위해 시뮬레이터를 운영하고 있다. 원자력 안전규제 지원, 사고 원인 분석은 물론 원전 산업 육성을 위한 대외협력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난해 한 해 동안에만 517명이 시뮬레이터 교육에 참석했다.

작년 11월에는 체코 원자력안전국(SUJB) 관계자들이 시뮬레이터를 찾았다. 한국과 프랑스가 체코 원전 사업 수주를 위해 치열한 수주전을 펼치던 때다. 한국이 원전 건설 능력뿐 아니라 안전 관리와 규제 협력에서도 강점이 있다는 점을 시뮬레이터를 통해 보여줬다.

윤 선임연구원은 “당시 체코 규제기관에서 방문해 3시간 정도 투어를 하면서 시뮬레이터 소개와 함께 정상, 비정상, 비상, 중대사고 등 다양한 상황에 대응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시연했다”고 말했다. 체코 원자력안전국 관계자들은 당시 시뮬레이터를 보면서 한국의 원자력 안전 인프라(기반 시설)를 꼼꼼히 살폈다고 한다.

앞서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수주했을 때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제 몫을 했다. 당시 UAE는 별도의 원자력 규제 기관이 없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UAE에 전문가를 파견해 함께 규제안을 만들고 안전 기준도 정했다. UAE 파견 근무를 했던 박상렬 전문위원은 “한국이 규제, 교육, 안전 분야에서 UAE와 협력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은 2009년 한국과 원전 건설 계약을 맺은 아랍에미리트(UAE)에 전문가를 파견해 안전 관리, 규제 분야 협력을 진행했다. 왼쪽에서 세번째 박상렬 전문위원, 가운데 김무환 당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자력안전기술원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함께 원자력안전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이 원전을 수출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학생들을 매년 10명씩 받았다. UAE도 2011년 원자력안전학교에 학생을 보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의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 자국에서 원자력 안전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 전문위원은 “이번 체코 원전 수주의 일등 공신은 건설 능력이지만, 안전 관리와 규제 분야에서도 원전 산업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며 “앞으로 체코에서도 협력 제안이 들어 온다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자원을 동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원자력안전기술원은 원자력안전위원회 산하 기관이다. 임승철 원자력안전위원회 사무처장은 “유럽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경험이 있어서 원전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원전 수출이 오른발이라면 원전 안전규제는 왼발로 볼 수 있는 만큼 국내 우수한 원전 안전규제 경험을 활용해 원전 수출에서 역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