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현지 시각) 미국 서부의 지하 핵시설에서 ‘임계전 핵실험’이 실시되자 국제 과학계가 핵 군비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임계전 핵실험은 핵물질을 고성능 폭약으로 터뜨려 핵무기 신뢰성과 안전성을 살펴보는 핵폭발 없는 핵실험이다.

연쇄 핵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아임계(미임계) 상태에서 진행하는 실험이지만 과학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핵 사용과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시사하는 가운데 미국에서 진행된 핵실험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핵 군비 경쟁이 재현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연쇄 핵반응, 핵폭발 없는 핵실험

미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NNSA)은 14일 오후 네바다 국가 안보지(NNSS)로 알려진 핵실험장 내의 ‘임계전 핵실험을 위한 주요 지하실험실(PULSE·펄스)’에서 임계전 핵실험을 진행했다.

NNSA는 “핵폭발 실험을 핵탄두의 안전, 보안, 신뢰성, 효과를 뒷받침하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런 임계 이하 실험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번 실험이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에 관한 필수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수행됐다”고 밝혔다.

미국이 임계전 핵실험을 실시한 것은 지난 2021년 9월 이후 2년 8개월 만이다. 미국은 1992년 지하 핵실험을 중단하고 이번을 포함해 핵폭발 없는 임계전 핵실험을 이미 34차례 진행했다.

임계전 핵실험은 핵폭발을 유발하는 핵실험과는 다르다. 핵실험은 강력한 폭발력을 유발하기 위해 연쇄 핵반응을 유도한다. 중성자가 원자에 부딪혀 다시 중성자를 만들어내듯 하나의 핵 반응이 하나 이상의 핵 반응을 유발하는 과정이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같은 핵물질이 이렇게 제어되지 않은 채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면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반면 임계전 핵실험은 핵 연쇄 반응에 따른 핵폭발을 유발하지 않는다. 강철 구체 내부에서 고폭탄을 이용해 작은 플루토늄 조각을 터뜨리는데, 폭발 과정에서 핵물질에 극한의 압력을 가한다. 실험에 사용되는 폭발물과 핵물질 양은 연쇄 핵반응이 발생하지 않는 수준까지만 사용한다. 미국은 이 정도의 폭발로도 비축된 핵무기를 시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2017년 9월 로렌스리버모어 국립연구소 기술자들이 재래식 폭발물과 모의 부품을 사용한 임계전 핵실험에 사용될 용기를 살펴보고 있다. /미 로렌스리버모어 국립연구소

◇미 “임계전 핵실험 횟수 더 늘릴 것”

이번 실험은 네바다 지하 핵실험 시설인 펄스에서 시행됐다. 이곳은 핵폭탄에 들어가는 플루토늄을 사용해 임계전 핵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미국 내 유일한 장소이다. 미국은 자세한 실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번 실험에서 핵탄두에 사용되는 핵물질 거동과 관련해 필요한 데이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향후 실험 결과를 활용해 최근 30년 이상 추진해온 과학 기반의 핵무기 비축 관리 프로그램을 향상시킨다는 계획이다.

NNSA는 또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실험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다. 두 연구소는 미국의 대표적 핵무기 설계 연구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로렌스리버모어연구소는 W80 공중 발사 순항 미사일 탄두, W87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탄두, B83 메가톤급 핵폭탄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마빈 애덤스 NNSA 국방 프로그램 부국장은 “지하 핵폭발 실험으로 돌아갈 기술적 필요없이 핵무기 물질에 대한 중요한 데이터를 계속 수집할 수 있도록 이러한 아임계 실험의 빈도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에 발표된 미국 회계감사원 보고서를 보면 미국은 임계전 핵실험에 앞서 새로운 플루토늄의 측정장비 두 개 시설을 구축하고 있다. 핵무기 비축량을 현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와 관련 인프라 개량에는 약 25억~26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되며 2030년까지 준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미국 네바다 핵실험장 곳곳이 지하 핵실험의 결과로 움푹 패어 있다. /미 에너지부

◇미··중 핵실험 대신 임계전 핵실험 경쟁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한 강대국들은 종전 이후 앞다퉈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곳곳에서 핵실험도 잇따랐다. 유엔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원자력 보유국인 미국은 1945년에 처음, 1992년에 마지막으로 총 1032회의 핵실험을 했다. 옛소련은 1949년부터 1990년까지 715차례의 시험을 했고, 중국은 1964년부터 1996년까지 45차례의 시험을 했다.

핵실험은 지표면과 공중, 대기권, 바다, 지하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시도됐다. 지하 핵실험이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대부분 실험은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유발했다. 하지만 임계전 핵실험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미국은 지난 1992년부터 지하 핵실험을 중단하고 임계전 핵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NNSA는 이번 실험이 연쇄 핵반응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핵실험 중지 조치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자신들이 서명했지만 비준하지 않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규제 대상에 임계전 핵실험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21세기 들어서도 정권에 관계 없이 핵실험을 한결같이 진행하고 있다.

핵군비 경쟁국인 러시아와 중국도 지하 핵실험을 중단하고 임계전 핵실험을 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수 십 차례를, 중국도 23건 정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임계전 핵실험으로 핵무기 보유국 반열에 올랐다. 북한 역시 지난 2018년 대륙간탄도탄(ICBM) 시험을 중단하겠다며 핵실험장 폐쇄 계획을 내놓으면서 임계전 핵실험을 실시했다. 2022년에도 임계전 핵실험이 진행됐다는 증언도 있다.

◇3국 핵실험장 “확장 중” 실제 핵실험 재개 우려

미국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핵실험이 진행된 후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

핵무기 보유국이 기존 핵실험장에서 실시하는 임계전 실험 프로그램은 국제 사회의 검증을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지금은 임계전 핵실험에 만족하고 있지만 언젠가 핵폭발을 일으키는 핵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네바다 사막에, 중국은 신장 위구르에, 러시아는 북극해 군도인 노바야젬랴(Novaya Zemlya)에서 핵실험장을 운용하고 있다. 제임스 마틴 비확산연구센터의 제프리 루이스(Jeffrey Lewis) 교수가 공개한 위성사진을 보면 이들 핵실험장 3곳은 몇 년 전보다 확장된 모습이다. 실험시설에 새로운 터널이 생겼고 새 도로와 저장 시설과 함께 현장을 오가는 차량 통행량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실제 핵실험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뜻으로 분석된다. 미국 과학자연맹(FAS)의 핵연구프로젝트 책임자인 한스 크리스텐센(Hans Christensen) 연구원은 강대국 중 하나가 핵실험을 재개하면 다른 나라들도 연쇄적으로 실험을 재개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과 중국은 CTBT에 서명한 뒤 한 번도 핵실험을 하지 않았지만 비준은 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조약을 비준국이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이 조치를 취하면 실제 테스트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핵 전쟁 위기는 어느 때보다 올라갔다.

새로운 핵무기의 등장도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러시아는 핵 탑재가 가능한 어뢰와 핵탄두 순항 미사일과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5분의 1의 폭발력(1kt)을 가진 이런 소형 핵무기는 핵실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참고 자료

미 에너지부, https://www.energy.gov/nnsa/articles/nnsa-completes-subcritical-experiment-pulse-facility-nevada

미 로스앨러모스 스터디 그룹, https://www.lasg.org/archive/1998/subcritical.htm

네바다 국가 안보부지, https://nnss.gov/mission/stockpile-stewardship-program/u1a-compl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