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을 20분에 주파하는 ‘꿈의 열차’가 있다. 진공 상태의 튜브 속을 열차가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신개념 교통 수단인 ‘하이퍼루프(Hyperloop)’다. 혁신가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와 리처드 브랜슨 같은 이들이 미래 교통수단으로 하이퍼루프를 점 찍으면서 전 세계가 기술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하이퍼루프의 최종 목표는 시속 1000㎞다. 전 세계 연구진이 최종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최근 중국에서 새로운 기록이 나왔다. 중국항공우주과학 공업그룹(CASIC)은 지난달 자체 개발한 하이퍼루프인 ‘T-플라이트’ 시험 운행에서 시속 623㎞를 기록했다. 2㎞의 짧은 거리를 주행한 기록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하이퍼루프 주행 속도 가운데 최고다. CASIC는 시험 운행 거리를 조금씩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T-플라이트’의 성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독일과 캐나다 등 여러 국가가 하이퍼루프 상용화를 위해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2030년대 중반에는 상용화가 가능하리라는 전망이 있다.
반면 철도 기술 선도국 중 하나인 한국은 최근 하이퍼루프 개발이 중단됐다. 한국은 전 세계에 몇 없는 고속열차 기술 보유국이다. 하이퍼루프는 ‘시속 400㎞’ 고속열차와 함께 미래 교통수단의 핵심 기술로 꼽히지만, 고속열차 기술 선도국인 한국은 하이퍼루프 기술 개발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한국형 하이퍼루프 기술 개발은 ‘하이퍼튜브 기술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 국토교통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 주관부처로 나서서 2025년부터 2030년까지 하이퍼루프 상용화를 위한 8개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사업이었다. 1단계 사업에 3377억원, 2단계 사업에 789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연구개발(R&D)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작년 말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2018년부터 관련 연구기관과 정부부처가 함께 사업을 준비했지만 ‘경제성’ 부족이라는 걸림돌을 넘지 못했다.
이 사업은 새만금 일대에 2㎞ 규모의 테스트배드를 구축해 하이퍼루프에 사용할 핵심 차량 기술과 추진 기술, 자기부상 기술, 통합 운영 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제성 부족을 근거로 모든 기술 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조선비즈가 입수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예타 보고서는 하이퍼루프 사업 자체의 현실성에 의구심을 표한다. 보고서는 2㎞ 시험 구간에서 시속 1200㎞의 하이퍼루프 기술 구현을 위해 필요한 사양을 검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중국 CASIC를 비롯해 전 세계 많은 연구기관이 2㎞에서 하이퍼루프 기술 검증을 시작한다. 한 연구자는 “시속 1200㎞의 하이퍼루프 기술을 2㎞ 시작품에서 어떻게 검증하느냐는 지적은 기술적인 내용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지적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12명의 평가자들은 한국형 하이퍼루프 사업의 정책적 타당성에서는 팽팽한 의견을 냈다. 5명이 시행, 7명이 미시행 입장을 냈는데, 경제적 타당성에서는 12명이 모두 미시행 의견을 냈다. 보고서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을 살펴보면 하이퍼루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기에 경제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식이다. 보고서는 현재 사업 계획은 핵심기술 개발이기 때문에 상용화와는 관련이 없다며 기술 상용화로 인한 이점을 경제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정부가 2044년을 하이퍼루프 상용화 시점으로 잡은 것에 대해서도 보고서는 “불확실성과 위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 기술 개발이 실패할 경우 매몰비용의 위험이 크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런 지적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적인 R&D를 장려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설명과는 정반대다. 전 세계가 미래 기술로 낙점하고 투자하는 하이퍼루프 기술에 정작 한국 정부는 ‘불확실성과 위험이 크다’며 초기 투자도 중단한 것이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작년 11월 윤석열 정부의 R&D 혁신방안을 발표하면서 도전적·혁신적 R&D 사업에 대해서는 예비타당성 조사 패스트트랙이나 면제를 적극 인정하고, 도전·혁신성이 높은 사업에 대해서는 기존의 선정·탈락 중심 심사에서 벗어나 전문가 검토와 대안 제시를 통해 기획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발표가 나기 불과 보름 전에 한국형 하이퍼루프 사업은 불확실성이 크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하이퍼루프 기술 개발에 참여한 한 연구진은 “예타 결과는 민간 중심으로 기술 개발을 진행하는 해외와 비교해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 구조를 문제 삼는데, 국토가 작은 한국에서 하이퍼루프를 먼저 개발하겠다고 나설 민간 기업이 있을 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핵심기술 개발을 도와야 기업들이 함께 나설 텐데, 경제성이 부족하다며 예타까지 탈락시키는 건 미래 교통 수단인 하이퍼루프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