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에 유전자를 넣어 형질을 바꾸는 작업을 자동화한 기계입니다. 이전에는 일일이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이 장치를 통해 작업 속도와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최대 96종의 세포를 동시에 작업할 수 있어 합성생물학 연구 속도가 가속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5일 오전 대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본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한 실험실. 세포에 유전자를 넣어 형질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실험실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로봇팔이 분주하게 오고가며 사람이 하던 연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곳은 생명연이 합성생물학 산학연 협력을 위해 설치한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이다. 장비 시연을 하던 연구원은 "바이오파운드리는 자동화와 인공지능(AI) 기술을 바탕으로 차세대 산업의 기반 기술인 합성생물학 연구를 하는 시설"이라며 "연구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만이 아니라 장비 국산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합성생물학은 생명체의 유전자를 변형해 특정 물질의 생산에 최적화시키는 연구 분야이다. 세포에서 원하는 물질을 대량으로 생성하거나 합성하는 기술로, 세포공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5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에서 연구원이 유전자 조작 자동화 장치를 제어하고 있는 모습. 이 시설은 향후 구축될 바이오파운드리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고 있다./대전=이병철 기자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은 생명연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바이오파운드리 사전 연구용 소규모 시설이다. 세포 공장으로 불리는 바이오파운드리는 다양한 기술을 융합해 세포의 특성을 빠르게 개량하는 데 특화된 시설이다. 반도체 산업에서 위탁생산을 전담하는 기업을 의미하는 '파운드리' 개념을 바이오 산업에 적용해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

이날 방문한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은 직접 사람이 실험하는 일반적인 실험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시설 한 가운데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장비인 'DNA 워크스테이션'에서는 로봇팔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세포에 새 유전자를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워크스테이션을 통제하는 컴퓨터에서는 필요한 작업에 따라 명령을 입력할 수 있었다. 작업자가 작업을 명령하자 내부에 있는 로봇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내부에는 서로 다른 3종류의 실험 장비가 들어 있다"며 "모두 유전자 조작에 필요한 장비로 이전에는 사람이 해야 했던 작업을 자동화 장치로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에 있는 실험 자동화 장비. 세포에 새로운 유전자를 넣어 형질을 바꾸는 실험을 기존보다 10배 빠르게 할 수 있다./대전=이병철 기자

이날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 소개를 맡은 김하성 생명연 합성생물학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이 시설에서는 기존보다 10배 빠른 속도로 연구가 가능하다"며 "빅데이터를 활용한 단백질 디자인 소프트웨어 같은 추가 기능을 도입해 합성생물학 연구에 혁신을 일으킬 전망"이라고 말했다.

합성생물학은 생명과학에 공학 개념을 도입해 유전자, 단백질, 인공 세포를 만드는 기술 분야다. 이미 미국, 영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를 비롯한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는 합성생물학을 국가 차원의 전략기술로 정하고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한국도 이같은 움직임에 발맞춰 합성생물학 기술 육성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정부는 2025년부터 5년 동안 1263억원을 투자해 '바이오파운드리 인프라 및 활용기반 구축사업'을 진행한다. 이 사업은 합성생물학 연구 인프라(기반 시설)을 갖추기 위한 바이오파운드리 전용 센터 구축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이날 찾은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은 본격적인 바이오파운드리 전용 센터를 위한 일종의 사전 준비 성격을 갖고 있다. 바이오파운드리 시설에 필요한 장비, 소프트웨어를 연구하고 운영 경험을 쌓기 위한 공간인 셈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오랜 시간이 걸리던 생물학 연구 과정을 단축하려면 한정된 시간에 많은 실험을 반복하거나 빅데이터를 활용해 효율을 높여야 한다"며 "이렇게 되려면 자동화 기술뿐 아니라 여러 실험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고 빅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기술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을 바탕으로 한국이 합성생물학 기술 주도권을 갖기 위한 기술 개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인력 양성, 기술 국산화 준비도 한창이다. 조병관 KAIST 교수는 "KAIST이 설립한 공학생물대학원을 통해 전문 인력이 배출될 예정"이라며 "미국, 영국을 비롯한 기술 선진국과의 협력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5일 대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을 방문해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을 참관했다. 이 장관은 "이 시설이 합성생물학 혁신을 위한 전문가들의 소통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대전=이병철 기자

임현의 한국기계연구원 연구부장은 "바이오파운드리 인프라 구축 사업은 예타를 통과해 진행이 예정돼 있으나 정작 장비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점유율은 0.3%로 참혹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계연은 산업통상자원부와 과기정통부의 범부처 사업을 통해 장비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선 핵심 장비 4종을 자체 기술로 개발하고 하나의 플랫폼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임 부장은 "소스개발부터 자동화 표준모델 구축까지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이 모든 과정은 바이오파운드리 베타 시설과 연계해 이뤄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설 참관을 위해 이 곳을 찾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한국도 5년 뒤 바이오파운드리를 구축해 합성생물학 기술 혁신을 가속화한다는 계획이 있다"며 "전문가들의 협력과 소통의 장으로 혁신을 촉진하는 기회를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