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돌아다니며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을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컴퓨터뿐 아니라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모빌리티에서도 충분한 데이터 저장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플라스틱 테이프에 산화철 같은 자성 재료를 바른 자기 테이프가 주로 쓰인다.
일각에선 데이터 저장 밀도가 정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저장공간을 넘어 생성되는 정보의 양이 2000만 페타바이트(PB)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1PB가 1000조바이트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저장되지 못하고 날아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데이터를 담을 그릇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최근 인간을 비롯해 생명의 유전 정보를 담은 디옥시리보핵산(DNA)이 정보 범람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의 몸이 언젠가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이터센터가 될 시대가 올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암란 간굴리(Amlan Ganguly) 미국 로체스터공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지난달 30일 DNA에 저장된 데이터로 인공 신경망 계산을 수행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조선비즈는 유전 정보를 넘어 디지털 데이터를 담는 DNA 저장장치에 대해 알아봤다.
DNA에 디지털 정보를 저장하는 기술은 2000년대 들어서 연구가 시작됐다. 흔히 디지털 정보는 ‘0′과 ‘1′의 비트(Bit)로 나타낸다. DNA는 아데닌(A)과 티민(T), 시토신(C), 구아닌(G) 분자가 이중나선 구조의 사이를 채운다. 예를 들어 A를 ‘00′으로 하거나 T를 ‘01′, C를 ‘10′, G를 ‘11′로 하는 규칙을 만들고 규칙에 따라 염기서열을 배열하면 된다. 저장된 데이터는 널리 쓰이는 DNA 분석 기술로도 판독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 DNA 1g에는 수백 PB를 저장할 수 있다. 무게 1㎏에 전 세계 데이터양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다. 염기 사이 간격이 0.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이기 때문에 정보를 반도체보다 많이 저장할 수 있다. 기존 데이터 저장장치보다 수명이 길고 보관도 쉽다. DNA칩을 개발하는 프랑스 기업 바이오메모리(Biomemory)가 보증하는 수명은 150년이다.
DNA 저장장치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암란 간굴리 미국 로체스터공대 교수팀은 DNA에 저장된 데이터를 인공 신경망으로 컴퓨팅 작업을 하는 미세유체 집적회로를 설계했다. DNA의 분자를 조작해 덧셈과 곱셈, 네트워크에 필요한 함수를 계산했다. 앞서 개발된 DNA칩들이 글자를 저장하는 데 기능이 한정된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연구를 이끈 간굴리 교수는 “새로 개발한 회로는 기존 메모리 하드웨어보다 약 3~6배 정도 작고, 안정적이고, 내구성도 뛰어나다”며 “특히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데이터 센터는 지속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도 DNA 저장장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MS는 미국 워싱턴대 컴퓨터공학부와 협력해 2018년 DNA 서열로 데이터를 인코딩하고 읽을 수 있는 저장장치를 개발했다. 특히 DNA 서열 정보로 써 저장하고 읽는 과정이 모두 자동화해 실용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DNA 저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관심을 갖는 기관도 많아졌다. 미국에서는 정부기관과 대학, 기업이 모여 ‘DNA 데이터 스토리지 얼라이언스(DNA Data Storage Alliance)’를 설립했다.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해 데이터 손상과 전력 소모가 없는 DNA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부 기관 외에도 영화사나 보잉과 같은 기업들이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DNA 저장장치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다. MS가 2018년 개발한 저장장치는 ‘HELLO’라는 단어를 DNA에 저장하고 불러오는 데 21시간이 걸렸다. DNA 저장장치가 기존 장치와 경쟁하려면 1초에 2GB를 써야 하는데, 이는 DNA로 치면 1초당 20억 개의 염기를 조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MS는 650㎚ 수준의 미세 전기화학 공정에서 반도체처럼 DNA를 합성하는 기술을 2021년 개발했다. DNA 합성에 필요한 용매를 만드는 회사들과의 협업으로 효소와 DNA 합성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해 지난해 5월 미국화학회(ACS)가 발간하는 국제학술지 ‘ACS 합성생물학(ACS Synthetic Biology)’에 발표하기도 했다.
롭 칼슨(Rob Carlson) 미국 워싱턴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가 발간하는 스펙트럼(Spectrum)지에 “DNA 저장 기술은 디지털 논리와 생화학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데이터 저장 기술은 기업이나 국가가 원하는 전략적 기술이 될 수 있으며 DNA는 인간이 발견한 것 중 가장 정교하고 안정적인 정보 저장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참고자료
PLoS One(2023),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292228
ACS Synthetic Biology(2023), DOI: https://doi.org/10.1021/acssynbio.3c00044
Science Advances(2021), DOI: https://doi.org/10.1126/sciadv.abi6714
Scientific Reports(2019) DOI: https://doi.org/10.1038/s41598-019-412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