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헬스케어 시대가 열리고 있다. 머크와 일라이릴리, 아스트라제네카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은 일찌감치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진출해 다양한 의약품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우주 공간에서는 지구에서 불가능했던 다양한 신약 실험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단백질 결정이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는 덕분에 고순도의 약물을 얻을 수 있다. 우주 진공 환경에서 약물을 나노미터(㎚) 단위로 작게 만들면 약물 용해도가 높아지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면 코로나 치료제를 정맥에 주사하지 않고 환자가 직접 복용할 수도 있다.
우주 산업 육성을 총괄하고 있는 조선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거대공공연구정책관은 미국의 바이오 기업인 람다비전의 인공 망막 연구를 대표적인 우주 헬스케어 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 인공 망막을 만들려면 얇은 단백질 조직을 쌓아 올려야 하는데 중력의 영향을 받는 지구에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 저궤도는 미세중력 상태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균일한 인공 망막 제작이 가능하다. 우주 헬스케어 시장 규모는 2030년에 100억달러(약 13조1200억원) 규모로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우주 헬스케어에 도전하는 한국 기업들도 있다. 위장약인 겔포스로 유명한 제약사 보령은 작년부터 우주 헬스케어 사업에 뛰어들었다. 보령은 지난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미국 최대 우주산업 콘퍼런스 ‘ASCEND(Accelerating Space Commerce, Exploration, and New Discovery)’에서 HIS(Humans In Space)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HIS 심포지엄은 우주 장기 체류와 관련된 인체 건강과 체류 환경 개선, 지구 문제 해결에 우주 환경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산업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열리는 행사다. 보령과 미국의 우주 기업인 액시엄스페이스, MIT SEI가 함께 주최했다.
이날 행사의 메인 이벤트는 HIS 챌린지 결선이었다. 우주 헬스케어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전 세계 31개국에서 100여개 팀이 참가한 대회다. 예선을 거쳐 15개 스타트업과 10개 연구팀이 결선 무대에서 자신들의 솔루션과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달 중순에 발표되는 최종 선정팀에 뽑히면 10만달러의 투자금을 받고, 액시엄스페이스의 ‘Ax 미션’에 참여할 기회도 받는다.
HIS 챌린지 결선에 오른 25개 팀 중에는 한국 스타트업과 연구자들도 있었다. 특히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독특한 아이디어와 연구 성과로 주목받았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계동의 보령 사옥에서 HIS 챌린지 결선에 오른 한국 바이오 스타트업 3팀을 함께 만났다.
◇우주에선 화장실이 건강검진센터가 된다
바이오뱅크힐링은 국내 최대 규모의 대변은행을 보유한 스타트업이다. 대변에 있는 미생물을 분석해 건강상태를 진단하고, 대변 속 유익균을 이용한 신약 개발에 나서고 있다. 2016년에 설립돼 지금까지 50억원 정도의 누적 투자유치를 받은 바이오 스타트업이다.
바이오뱅크힐링은 1g의 대변 샘플만으로도 장내 미생물을 분석할 수 있는 카트리지를 들고 HIS 챌린지에 나섰다. 바이오뱅크힐링이 우주를 주목한 건 우주에서는 화장실이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진단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원석 바이오뱅크힐링 이사는 “우주 공간에서는 사람의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여러 질병에 취약해지는데, 우주에는 병원도 없고 건강을 진단할 실험실도 없다”며 “대변에는 사람의 몸 속에서 가장 많은 장내 미생물 정보가 모여 있기 때문에 우주인의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할 때 이용하기 좋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이사가 들고 온 진단 장치는 작은 노트북 정도의 크기로 휴대하기 편해 보였다. 기존 장비보다 크기를 줄이고 분석에 필요한 시간도 단축했다는 게 이 이사의 설명이다.
파프리카랩은 눈에 착용하는 콘택트렌즈와 피부에 부착하는 패치 형태의 웨어러블 선량계를 개발하고 있다. 이 장치를 이용하면 개인의 방사선 피폭 여부와 피폭량을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김정인 파프리카랩 대표는 “우주 공간은 지구에서보다 방사능에 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며 “우주선이나 인공위성 같은 장비에 우주 방사선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는데, 우주인이 우주 방사선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는 생각보다 연구가 적어서 관심을 갖고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방사능 피폭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는 지금도 있지만, 파프리카랩처럼 스마트렌즈 형식의 장치는 없다. 김 대표는 웨어러블 형태의 선량계를 필요한 부위 어디에나 붙일 수 있다며 특히 눈은 방사선에 가장 민감한 부위여서 렌즈 형태로 측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메그노시스는 두피에 전류를 흘려서 알츠하이머병과 우울증을 진단하고 치료까지 할 수 있는 헤드셋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이순혁 메그노시스 대표는 우주와 지구의 중력 차이가 뇌 내 혈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뇌 내 혈압을 측정하는 헤드셋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중력이 적은 우주에서는 몸의 혈액이나 체내 수분이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위로 올라오면서 뇌의 압력도 높아진다”며 “뇌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몸에 여러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뇌 내 혈압을 비침습적으로 측정하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진단과 치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 메그노시스의 강점이라며 단순히 진단에서 끝나지 않고 환자 맞춤형 치료까지 함께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주에 제약 실험실 만드는 보령
우주 헬스케어에 뛰어든 스타트업들은 하나 같이 우주 환경에서 직접 실험과 임상을 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우주 환경을 겨냥해 준비하는 제품과 서비스인 만큼 우주에서 미리 실험을 할 기회를 잡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순혁 대표는 “지구에서는 환경이 일정하다보니 질병 치료에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며 “우주의 미세 중력에서는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더 커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면 치매를 비롯한 질병의 매커니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보령은 액시엄스페이스와 함께 우주 공간에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액시엄스페이스는 2030년 퇴역을 앞둔 ISS를 대신할 민간 우주정거장을 개발하고 있다. 보령은 액시엄스페이스가 구축하는 새로운 우주정거장 모듈에 헬스케어 연구개발(R&D)을 할 수 있는 실험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바이오 기업들이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우주에서 검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HIS 챌린지에서 좋은 성과를 낸 스타트업과 연구자들이 보령의 우주 R&D 인프라의 첫 고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보령 관계자는 “HIS 챌린지 최종 선정 스타트업 가운데 우주에서 R&D 수요가 있는 경우에는 별도 심사를 거쳐 향후 Ax 미션에 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