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너지부 산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슈퍼컴퓨터 '프론티어(Frontier)'./오크리지 국립연구소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은 차세대 항공기에 적용할 ‘개방형 팬 제트 엔진’을 설계하고 있다. 항공기 엔진 개발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공기역학이다. 하지만 엔진 주변에 흐르는 난기류는 과학자들도 예측을 못 하고 있다. 난기류가 압력·온도 변화와 같은 거시적 영향과 공기 중의 분자들이 서로 마찰하는 것과 같은 미시적 영향에 모두 반응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제트 엔진 개발 난제에 해결사로 등장한 건 슈퍼컴퓨터다. GE는 난기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컴퓨터 ‘프론티어(Frontier)’로 대기 물리학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프론티어는 태양이 대기 중 원자를 밀어서 다른 원소를 형성하고 에너지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굉장히 세밀한 수준으로 난기류를 분석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가 발행하는 ‘MIT 테크놀로지리뷰’는 최근 ‘엑사급’ 슈퍼컴퓨터 프론티어를 활용하는 방안을 소개했다. 프론티어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슈퍼컴퓨터로, 1초에 110경2000조 번의 연산이 가능해 최근 2년 연속 전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슈퍼컴퓨터 연산 능력은 보통 1000조를 의미하는 페타플롭스(PetaFLOPS)로 표시하는데, 프론티어는 성능이 워낙 좋아 100경을 뜻하는 ‘엑사플롭스(ExaFLOPS)’급 슈퍼컴퓨터로 불린다.

전 세계가 고성능 컴퓨팅(HPC)과 인공지능(AI) 시스템을 확보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공식적으로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보유한 건 미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슈퍼컴퓨터 전문가들은 중국 역시 이미 최고 수준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했다고 본다. 유럽과 일본 등 다른 선진국들의 엑사급 슈퍼컴퓨터 개발도 임박했다. 조선비즈는 27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발간한 보고서를 분석해 ‘슈퍼컴퓨터 전쟁’을 살펴봤다.

미국 에너지부가 구축 중인 슈퍼컴퓨터 오로라./인텔

슈퍼컴퓨터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국가는 네 곳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이다. 미국은 프론티어 이후 2개의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설치 중이다.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는 올해 6월 인텔과 함께 2엑사플롭스급 슈퍼컴퓨터 ‘오로라(Aurora)’를 설치했다. 내년 초부터 운영되는 오로라는 중앙처리장치(CPU) 2만1248개, 그래픽처리장치(GPU) 6만3744개로 이뤄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가 될 전망이다. 또 미국 리버모어 국립연구소는 내년 슈퍼컴퓨터 ‘엘 캐피탄(El Capitan)’을 출시해 핵무기 실험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보고서는 “미국은 슈퍼컴퓨터 개발 분야에서 항상 강국의 지위를 유지해왔다”며 “고성능 컴퓨팅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발이나 운영, 활용 관련 개별 법률을 제정해 정부 차원에서 활성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에너지부 산하 세 개의 국립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아키텍처의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한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슈퍼컴퓨터 성능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고 있다. 중국 국방과기대가 개발한 슈퍼컴퓨터 ‘톈허2호’가 2013년 전 세계에서 1위에 오른 적이 있는데, 이후 미국은 톈허2호에 사용되는 인텔의 CPU 수출을 금지했다.

보고서는 “중국의 경우 미국의 수출 금지와 맞물리면서 모든 부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방향으로 슈퍼컴퓨터 기술이 발전했다”며 “반복해서 만들다 보니 솜씨가 늘어 공식적으로 등재하지 않은 엑사급 슈퍼컴퓨터 두 대를 이미 구축해 가동 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21년 튜링상을 수상한 잭 동가라(Jack Dongarra) 미국 테네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최근 홍콩 사우스차이나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3대 정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보유한 슈퍼컴퓨터는 총 134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규모다.

일본도 슈퍼컴퓨터 분야의 강자로 통한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후지쓰(Fujitsu)가 개발한 ‘후가쿠(Fugaku)’는 442페타플롭스 연산이 가능한 슈퍼컴퓨터다. 일본은 후가쿠의 뒤를 이을 차기 슈퍼컴퓨터 개발을 논의 중이다. 이 본부장은 “시기적으로 볼 때 일본의 차기 시스템은 엑사플롭스 슈퍼컴퓨터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유럽은 2018년부터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하는 ‘EuroHPC JU’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5억200만 유로(7152억원)를 들여 개발한 슈퍼컴퓨터 ‘주피터(Jupiter)’를 2024년 말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과학계와 산업계가 고성능 컴퓨팅 시스템을 원활히 이용할 수 있도록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최소 2대 추가로 구축한다.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양자컴퓨터가 차세대 컴퓨터로 언급되고 있지만, 슈퍼컴퓨터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보고서는 “흔히 오해하는 게 양자컴퓨터가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양자컴퓨터는 특정 분야에만 사용할 수 있다”며 “양자컴퓨터는 특정 문제의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등 최적화 요건을 찾는 데 유용하고, 과학계나 산업계에서 흔히 쓰는 시뮬레이션이나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범용성 측면에선 여전히 슈퍼컴퓨터가 많이 쓰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총 8대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차기 슈퍼컴퓨터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KISTI에서 운영 중인 누리온은 2018년 세계 11위를 차지한 이후 49위까지 순위가 하락했다. 한국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 삼성종합기술원의 슈퍼컴퓨터 ‘SSC-21′은 올해 20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2929억원을 들여 600페타플로스 성능의 슈퍼컴퓨터 6호기를 구축할 예정이다. 다만 장비 구축에는 2929억원 중 2100억원이 소요되는데, 최근 GPU 가격이 폭등해 조달청에 공고한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 사업이 두 차례 유찰됐다. 현재 올라온 사업 공고는 10월 26일까지 진행된다. 최근 삭감된 연구개발(R&D) 예산과 관련해선 운영비가 전부 확보됐기 때문에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과 운영에는 문제가 없다는 게 KISTI의 설명이다.

KISTI 관계자는 “슈퍼컴퓨터 6호기는 2024년 하반기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컴퓨터”이라며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했기 때문에 현재로선 구축과 운영에 대한 예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또 다른 슈퍼컴퓨터 구축을 위해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KISTI ISSUE BRIEF, DOI: https://doi.org/10.22810/2023KIB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