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죽음의 병'으로 불렸던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인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한 번의 면역세포 주입으로 장기간 억제할 수 있다는 초기 연구 결과가 나왔다. 매일 약을 먹지 않고도 바이러스를 눌러두는 새로운 치료법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의 HIV 전문가 스티브 딕스 박사 연구팀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미국 보스턴에서 열리는 유전자 치료 학회에서 발표한다고 뉴욕타임스가 12일 보도했다.
HIV는 치료가 까다로운 바이러스다.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약 복용을 중단하면 다시 증식한다. 돌연변이도 잘 일으켜 면역 공격을 피해 간다. 과거에는 감염되면 사실상 사망 선고처럼 받아들여졌지만,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의 발전으로 지금은 장기간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에 가까워졌다. 다만 전 세계 4000만명 넘는 감염자는 매일 약을 먹거나 한두 달에 한 번 주사를 맞으며 평생 바이러스를 억제해야 한다.
연구진은 혈액암 치료에 쓰이던 방식을 HIV 치료에 응용했다. 환자의 T세포를 꺼내 HIV 감염 세포를 공격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뒤 다시 몸속에 넣는 방식이다. 일부 백혈병과 림프종 치료에 쓰이는 CAR(키메라 항원 수용체)-T 치료와 비슷한 접근이다. HIV 감염자의 면역세포 표면에 두 가지 분자가 나타나도록 설계했다. 이 분자들은 HIV에 감염된 세포를 찾아 죽이고, 동시에 면역세포 자신이 HIV에 감염되는 것도 막도록 만들어졌다.
연구진은 이렇게 설계한 면역세포를 환자에게 주입하고, 주입 당일부터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복용을 중단하게 했다. 보통 HIV 감염자가 치료제를 끊으면 2주 안에 바이러스 수치가 급증한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두 명은 각각 92주와 48주 동안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수준을 유지했다. 한 번 치료로 2년 가까이 바이러스를 억제한 것이다.
장기 억제 반응을 보인 환자들은 모두 감염 후 몇 달 안에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한 경우였다. 반면 HIV에 감염된 상태로 오래 지낸 뒤 치료를 시작한 경우엔 반응을 보이지 않아 약 복용을 재개했다. 연구진은 초기 치료를 받은 환자일수록 몸속에 숨어 있는 HIV 저장고가 작고, 면역 체계 손상도 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기대와 신중론을 함께 내놓고 있다. 한 번의 면역세포 주입으로 일부 환자에서 장기간 바이러스 억제가 가능했다는 발견은 의미가 있지만, 연구 대상이 7명으로 적고 추가 검증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환자 세포를 꺼내 유전자를 고친 뒤 다시 주입해야 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걸림돌이다. 상용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암 치료에서 시작된 유전자 조작 면역세포 기술이 HIV 치료의 오랜 목표인 '약 없는 장기 억제'에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같은 면역세포 치료가 HIV의 '기능적 완치'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후속 연구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