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 초청장을 보니 드레스 코드가 '블랙 타이'였어요. 턱시도나 이브닝드레스 같은 정중한 옷을 입고 가야 한다는 얘기인데, 저는 뭘 입을까 생각하다 한복을 떠올렸어요!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에 '브레이크스루' 시상식만큼 근사한 자리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웃음)."
미국 입자물리학 연구 시설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Fermilab·이하 페르미랩)'의 명예소장인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23일 통화에서 들려준 말이다.
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 바커 행어에서 열린 '2026년 브레이크스루상(Breakthrough Prize) 시상식. 과학계에선 이날 김 교수가 입고 나타난 고운 초록빛 한복이 뜻밖의 큰 화제였다. 턱시도를 입은 전 세계 유명 과학자들 사이에서 한복을 입은 김 교수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브레이크스루상은 '과학계의 오스카', '실리콘밸리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 과학상이다. 2012년 러시아 출신 벤처 투자자 유리 밀너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구글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등이 만든 기초 과학상으로, 상금이 노벨상(약 15억원)의 3배인 300만달러(약 44억원)에 달해 과학계에선 상금이 가장 많은 상으로 꼽힌다. 매년 과학계의 최신 혁신 성과를 낸 이들에게 상을 수여한다.
◇'실리콘밸리의 노벨상' 시상식 달군 초록빛 한복
올해는 생명과학과 기초 물리학, 수학 부문에서 다섯 팀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중에서도 기초 물리학상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브룩헤이븐국립연구소, 페르미랩의 '뮤온 g-2 협력단'에 돌아갔다.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 중 하나인 뮤온(Muon)의 자기적 특성을 수십 년간 정밀 측정해 온 이들이다. 협력단은 뮤온의 'g-인자'를 10억분의 127이라는 경이로운 정확도로 규명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기 교수는 협력단의 한 축인 페르미랩의 명예소장 자격으로 이들의 수상을 축하해 주기 위해 시상식에 참석했다.
김영기 교수는 "이번에 수상한 분들은 제가 페르미랩 부소장으로 일할 때 뮤온 실험을 해보겠다고 저를 찾아왔던 과학자들이다. 이분들 연구를 돕기 위해 미국 에너지부(DOE)에 지원 신청을 했고, 실험 장치 '뮤온 g-2 링'을 건물에 설치하기 위한 첫 삽도 제가 부소장일 때 떴다. 또 뮤온 자성 측정의 마지막 결과는 제가 1년간 페르미랩 임시 소장으로 지낼 때 나왔다. 저로선 이번 연구 성과가 함께 낳은 자식 같고 그만큼 자랑스럽다. 시상식 참석 복장도 그래서 더 신경 썼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시상식을 위해 미국 시카고에서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던 한복 디자이너 강금희씨에게 한복을 맞췄다고 했다. 한복의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수 같은 장식이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택했다. 4월의 신록을 연상케 하는 광택이 은은한 초록빛 옷감을 골랐고, 옷고름과 옷소매 끝동 부분은 더 짙고 깊은 초록(심록·深綠) 빛깔로 꾸몄다.
김 교수는 "브레이크스루 시상식은 할리우드 여배우들도 참석하는 화려한 무대지만, 한복 덕분에 저도 눈길깨나 받은 것 같다"면서 "시상식 내내 많은 이가 '한복이 이렇게 멋진 옷이었느냐'고 칭찬해줬다"고 웃었다.
◇필요할 땐 부채춤도 추는 입자물리학의 거장
김 교수는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학자다. 미국에선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큰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입자물리학 부분에선 최고의 석학으로 불린다.
2000년 미국 과학 전문지 '디스커버'는 '향후 20년간 세계 과학 발전을 주도할 과학자 20명' 중 한 사람으로 김 교수를 뽑은 바 있다. 이때 '충돌의 여왕(Collision Queen)'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입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한 뒤 충돌해 우주 탄생의 초기를 재현하는 입자물리학 부문에서 단연 우뚝 선 여성이라는 뜻이었다.
2016~20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만 29명이 나온 시카고대에서 물리학과장을 지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입자물리연구소 페르미에선 2006~2013년 부소장을 지냈고, 2025년 1월부터 1년 동안 임시 소장을 역임했다. 2024년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 물리학회장이 됐다. 현재 시카고대 석좌교수이자 페르미랩 명예소장이다.
남성과 백인 중심의 물리학계에서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선 김 교수지만 그는 전투적으로 학문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 교수는 "한국 전통 무용을 특히 좋아한다. 부채춤, 장구춤, 살풀이춤, 북춤 등등까지 다 출 수 있다. 각종 학계 모임에서 기회가 있을 때면 종종 내 춤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난 뼛속 깊이 한국인이다. 오랫동안 한국과 서양의 문화를 동시에 체험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갖게 된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외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한국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김 교수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기쁘다"고도 했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 곳곳에서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을 자주 만난다. 1980년대 미국에 처음 유학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젠 한복을 입고 있으면 다들 먼저 알아보고 다가온다. 유쾌하고 신나는 일 아닌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