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의 등장은 인공지능(AI) 기술 산업의 시간표를 앞당겼다. 언젠가 올 미래로 여겨지던 생성형 AI가 짧은 시간 안에 검색, 고객센터, 개발, 디자인, 콘텐츠 제작 같은 일상 업무에 스며들면서, 기업들의 투자 우선순위가 빠르게 재편됐다.
이 같은 경험이 시장에 남긴 건 '다음 변곡점은 무엇인가'라는 기대다. 그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분야가 양자컴퓨팅이다.
지난달 12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만난 미국 양자컴퓨팅 기업 '리게티 컴퓨팅'의 마이크 피치(Mike Piech) 사업개발 부사장은 "양자컴퓨터의 핵심 성능 지표인 오류율은 점근선처럼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며 "마법의 순간은 없다"고 말했다. 점근선은 어떤 목표 값에 한 번에 딱 도달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근접해 가는 곡선을 말한다. 피치 부사장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인시아드(INSEAD)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레드햇 부사장을 거쳐 2024년 리게티에 합류했다.
리게티는 2013년 설립된 초전도 방식 기반 양자컴퓨팅 기업으로, 양자 프로세서(QPU)부터 양자컴퓨터 시스템, 소프트웨어(클라우드)까지 자체 구축하는 풀스택 전략을 내세운다. 지난해 9월에는 미 공군연구소(AFRL)에서 3년간 580만달러(약 84억원) 규모의 초전도 양자 네트워킹 관련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지금의 컴퓨터가 0과 1로 정보를 처리한다면, 양자컴퓨터는 '큐비트(qubit)'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양자역학의 성질을 이용해 기존 컴퓨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연산할 가능성이 있어 주목받아 왔다.
양자컴퓨터 성능을 흔히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큐비트의 수이고, 둘째는 오류율이다. 큐비트가 많아질수록 더 큰 문제를 다룰 여지가 생기지만, 오류가 잦으면 계산 결과를 믿기 어렵다. 리게티는 1에서 오류율을 뺀 값인 '신뢰도(fidelity·충실도)'를 기준으로 쓴다. 예를 들어 신뢰도가 99.5%라면 오류율은 0.5%라는 뜻이다.
피치 부사장은 여기서 큐비트 수와 오류율을 따로 떼어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오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계산을 성립시키려면 여러 큐비트를 함께 써서 오류를 보정하는 방식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추가로 필요한 큐비트가 크게 늘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큐비트 수를 늘리는 일과 오류를 줄이는 일이 서로 맞물려 있어, 어느 한쪽만으로는 양자컴퓨터가 쓸 만한 단계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설명이다.
피치 부사장은 "양자컴퓨팅은 아직 초기 단계라 한 가지 문제가 아니라 모든 층이 동시에 성숙해야 하는 산업"이라며 "양자 프로세서 칩(QPU)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전자 장비, 운영체계·사용 환경 소프트웨어까지 기반 요소가 함께 발전해야 고객이 투자 대비 효과를 따질 수 있는 유용한 컴퓨팅에 가까워진다"고 덧붙였다.
이런 현실과 별개로, 최근 1년 사이 양자 분야를 향한 투자자의 관심은 크게 달아올랐다. 피치 부사장은 "투자자의 관심이 기술 개발의 구체적 이정표와 완전히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진 않는다"며 "리게티는 의식적으로 하이프(과장)를 피하고 공격적이되 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뒤 달성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했다.
리게티는 현재 84큐비트 99% 신뢰도, 36큐비트 99.5% 신뢰도 수준을 달성했고, 단기간 내 108큐비트 99.5% 신뢰도 목표를 제공할 계획이다. 올해 말 전후로는 150큐비트 이상에 99.7% 신뢰도, 2027년 말 전후로는 1000큐비트 이상, 99.8% 신뢰도를 제시했다.
한국과 영국, 이스라엘 등과의 협력도 넓혀갈 예정이다. 피치 부사장은 한국 파트너인 노르마가 주관한 '퀀텀 AI 경진 대회(해커톤)'를 후원하기 위해 방한했다. 해당 대회는 참가자들의 학습과 지식 공유, 그리고 양자 컴퓨팅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자 열렸다.
피치 부사장은 "최근 1년 사이 한국은 정부 투자를 통해 양자 산업을 선점화하려는 흐름이 뚜렷해졌다"며 "한국 생태계와의 접점을 넓히고 싶다. 목표는 한국에 최소 1대, 가능하면 여러 대의 양자 시스템을 현장에 설치해 생태계를 키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