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의 파이로프로세싱 연구시설 '프라이드(PRIDE).'/KAERI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6일 KBS 인터뷰에서 "우라늄 농축 및 핵연료 재처리 영역에서 지금보다 많은 권한을 갖는 방향으로 한미 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은 농축과 재처리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다"며 "미국에 일본과 동일한 수준으로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고, 미국의 긍정적 반응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한미 원자력 협정이 개정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협정이 개정되면 한국은 일본 수준의 핵연료 자립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통상 협상 변수로 인해, 오는 29일 경주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될지 불확실하다.

'일본식 모델'은 미국의 사전 승인 없이도 자국에서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수행할 수 있는 체계를 뜻한다. 현재 이런 권한을 가진 나라는 미국의 동맹국 중 일본이 유일하다. 한국은 현행 협정상 미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20% 미만의 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고,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는 금지돼 있다.

◇국내 사용후 핵연료 저장 시설, 내년부터 포화

한미 원자력 협정은 1956년 처음 체결됐고 2035년 6월 만료될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행정명령을 통해 만료 10년 전부터 재협상에 착수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이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이유는 핵연료 주기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특히 한빛·한울·고리·월성 등 주요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 저장 공간이 내년부터 10년 내 차례로 포화될 것으로 예상돼, 협정 개정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핵연료 주기는 원자로에 투입하기 전의 선행(前行) 주기와 사용 후 꺼내 보관·처리하는 후행(後行) 주기로 나뉜다. 선행 주기에는 우라늄을 발전용(發電用) 연료로 만드는 농축 과정이 포함된다.

원자로는 중성자가 우라늄과 충돌하면서 핵분열될 때 나오는 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한다. 국내 원자로의 저속 중성자는 우라늄 동위원소 중 원자량이 235인 우라늄235만 핵분열시킬 수 있다. 우라늄235는 천연 우라늄 중 0.7%에 불과해 농축 과정이 필수적이다.

현행 한미 협정은 한국에 발전용 20% 미만 저농축만 허용하고 있다. 핵무기에 쓰려면 90% 이상 농축해야 한다. 하지만 2015년 개정 이후 한국은 자체 농축을 실행한 적이 없다. 정부는 단순한 명시 권한을 넘어 농축 절차·연료 제조 전 단계에 대한 실질적 접근권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후행 주기는 원자로에서 핵분열을 마친 사용후 핵연료(폐연료봉)에서 다시 핵분열을 할 수 있는 물질을 회수하는 단계를 뜻한다. 이를테면 연탄재에서 미처 타지 않은 부분을 모아 새 연탄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한국과 미국은 함께 후행주기인 새로운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바로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이다.

폐연료봉을 질산으로 녹이는 습식 재처리는 핵무기로 쓸 수 있는 순수 플루토늄을 분리하기 쉬워 국제적으로 엄격히 규제돼 왔다. 반면 파이로프로세싱은 섭씨 550도로 태운 폐연료봉을 전기분해하는 건식 재처리 기술이다. 이러면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할 수 있다. 그보다 무거운 플루토늄·넵트늄·아메리슘·큐리움 등이 한데 섞인 금속을 따로 추출한다. 여기서 순수 플루토늄만 뽑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핵무기 전용 우려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이로프로세싱이 상용화되면 사용후 연료 중 일부를 다시 전기 생산에 쓸 수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에 따르면 방사능이 강한 고준위 폐기물 부피를 약 5% 수준으로 줄일 수 있고, 방사성 독성 반감기를 수천 년에서 수백 년 수준으로 단축할 수 있다.

러시아 스베르들롭스크주 자레치니에 있는 벨로야르스크 원자력발전소에 건설된 소듐고속증식로인 BN800./Rosatom

◇파이로프로세싱·고속증식로 개발 기대

특히 파이로프로세싱이 새로운 원자로와 결합하면 자원 재활용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재활용 연탄은 기존 아궁이에서도 타지만 전용 아궁이에서 더 효율이 좋다는 의미다.

여기서 고속증식로가 해법으로 거론된다. 고속증식로는 속도가 줄지 않은 '고속' 중성자를 이용해 천연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핵분열을 일으키지 못하는 우라늄238을 핵분열 물질인 플루토늄239로 바꿔 핵연료를 '증식'하는 원자로이다

고속증식로는 냉각재로 물 대신 나트륨(소듐) 같은 액체 금속을 쓴다. 중성자는 액체 금속에서 속도가 줄지 않는다. 이런 고속 중성자가 우라늄238을 때리면 핵분열이 가능한 플루토늄239가 된다. 원전에서 나오는 폐연료봉에는 우라늄238과 플루토늄239가 들어있다. 고속증식로는 이것을 태워 다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원자력계는 파이로프로세싱과 고속증식로가 결합하면 폐기물 저감과 자원 재순환이 가능한 폐쇄형 연료주기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파이로프로세싱과 소듐냉각고속로(SFR)를 함께 운용할 경우 기존 원전 시스템 대비 핵연료 활용 효율을 60~70% 이상 높일 수 있다.

문제는 고속로가 증식한 플루토늄239가 핵무기의 원료가 된다는 점이다. 무기 전용 우려를 없앨 장치가 필요하다. 안전성도 우려된다. 나트륨이 물이나 공기와 닿으면 폭발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몬주 고속로는 본격 가동에 들어간 1995년 나트륨 유출사고로 화재가 발생한 후 가동이 중단됐다.

하지만 최근 재료·제작·운전 기술의 발전으로 위험도가 낮아졌다는 평가도 있다. 러시아·인도·중국 등은 이미 고속증식로를 운영·건설 중이다. 한국은 KAERI가 1997년부터 파이로프로세싱과 SFR 기술 개발을 이어오고 있다. SFR은 2030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결정적 변수는 통상 협상 결과다. 한미 양국은 현재 "개별 안건의 분리 타결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통상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원자력 협정 개정 작업은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큰 틀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지만, 세부 내용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며 "개정 논의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어 결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