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우간다의 브윈디 국립공원에 살고 있는 44세의 암컷 산악고릴라. 무리의 암컷 3분의 1이 이 고릴라처럼 더 이상 번식을 하지 않고도 10년 이상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Martha Robbins

동물의 본능은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남기는 것이다. 대부분 동물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 번식한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2023년 기준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86.4세인데, 대부분 50세 전후로 생식을 중단하는 폐경(肺經)을 맞는다. 산술적으로 수명의 40% 이상이 출산과 무관한 셈이다.

과학자들이 인간과 같이 폐경을 맞고 오래 사는 동물을 새로 찾았다. 아프리카에 사는 산악고릴라다. 폐경은 지금까지 인간과 침팬지, 그리고 바다의 들쇠고래와 흑범고래, 범고래, 외뿔고래, 흰고래 7종(種)에서만 관찰됐다. 앞서 동물원의 고릴라에서 폐경이 관찰됐지만, 야생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암컷 3분의 1, 폐경 후 10년 이상 생존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마사 로빈스(Martha Robbins) 박사 연구진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브윈디(Bwindi) 국립공원에 사는 산악고릴라 집단에서 암컷의 3분의 1이 번식을 중단하고 최소 10년 이상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지난 13일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산악고릴라는 야생에서 30~40년 산다. 그렇다면 고릴라 역시 인간처럼 폐경 이후의 삶을 오래 누리는 셈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진은 "폐경이 관찰된 7마리 중 6마리는 35세 이상이었다"며 "야생 암컷이 50세까지 생존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폐경 이후가 수명의 25%를 차지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0년 전 미국 동물원에 사는 고릴라에서 폐경이 처음 확인됐지만, 야생 고릴라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연구진은 30년에 걸쳐 브윈디 국립공원에 사는 고릴라 4개 무리를 관찰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로빈스 박사는 "1998년 연구를 시작할 당시 성숙했던 암컷 두 마리가 2010년 마지막으로 새끼를 낳고도 아직도 생존 중"이라고 말했다.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범고래. 폐경이 지난 할머니가 다 큰 아들의 먹이를 챙기고 다치지 않게 보살핀다. 위험한 노산을 하기보다 자식을 보살펴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더 많이 퍼뜨리는 이른바 '할머니 가설'의 예이다./영 엑시터대

◇출산 대신 돌봄 선택한 할머니들

왜 인간과 침팬지, 고릴라, 고래들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일찍 출산을 포기할까. 과학자들은 영장류와 고래들의 조기 폐경은 노산(老産)의 위험을 감당하기보다 자식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더 많이 퍼뜨리도록 진화한 결과로 해석한다. 영국 셰필드대의 비르피 루마(Virpi Lummaa) 교수는 2004년 '네이처'지에 이른바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을 제기했다.

루마 교수 연구진은 산업화 이전 핀란드 루터교회의 출생, 결혼, 사망 기록을 분석했다. 그 결과, 여성은 폐경 이후 10년마다 평균적으로 2명의 손자를 더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할머니기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이 번성한다는 것이다.

범고래도 마찬가지다. 범고래 암컷은 90세까지 사는데 폐경 후 20년을 더 산다. 폐경이 지난 어미는 인간 사회의 할머니처럼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무리에게 알려주고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절반 이상 나눈다. 범고래 무리를 폐경이 지난 할머니가 이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 엑시터대의 다렌 크로프트(Darren Croft) 교수는 수십 년간 범고래 무리를 촬영한 영상을 분석해 할머니 가설을 입증했다. 2015년 '커런트 바이올로지' 발표 논문에 따르면 폐경이 지난 암컷이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끈 경우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보다 32% 많았다. 다 자란 수컷보다는 57%나 많았다.

폐경을 겪은 침팬지 암컷들. 왼쪽과 가운데는 각각 69세와 64세에 죽었고, 오른쪽은 61세로 2023년 현재 생존했다./Science

◇폐경은 영장류 공통 조상서 기원

폐경 현상은 한동안 포유류 중 사람과 범고래와 같은 이빨고래 5종 등 단 6종에서만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최근 폐경 목록에 영장류가 잇따라 추가됐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의 케빈 랭거그라버(Kevin Langergraber) 교수 연구진은 2023년 사이언스에 우간다의 키발레 국립공원에 사는 침팬지 무리에서 암컷이 마지막 출산을 하고도 오래 사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도 침팬지 암컷은 죽을 때까지 새끼를 낳는 종이라고 여겼다. 연구진은 1995년부터 침팬지 한 무리를 관찰했다. 놀랍게도 말린이라는 암컷 침팬지는 나이가 69세인데, 마지막 출산을 한 것은 23년 전의 일이었다.

연구진은 침팬지들이 폐경을 맞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소변을 채취해 네 가지 생식 호르몬 수치를 확인했다. 인간은 폐경 후 그중 두 호르몬이 감소하고 나머지 두 가지가 급증한다. 침팬지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연구진은 침팬지의 폐경 이후 생존 기간이 평균 수명의 20%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막스 플랑크 연구진은 "고릴라가 인간과 침팬지에 이어 폐경을 맞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영장류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될 것"이라며 "폐경의 기원이 아프리카 대형 영장류의 공통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다만 연구진은 고릴라의 폐경을 확증하려면 침팬지처럼 호르몬 분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참고 자료

PNAS(2025), DOI: https://doi.org/10.1073/pnas.2510998122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d5473

Current Biology(2015), DOI: https://doi.org/10.1016/j.cub.2015.01.037

Nature(2004), DOI: https://doi.org/10.1038/nature02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