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노벨 과학상 수상자 10명 중 3명 이상은 태어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연구를 이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9일(현지 시각) 2000년 이후 물리학과 화학, 생리의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202명 중 약 30%가 이민 과학자로, 때로는 두 번 이상 국경을 넘나드는 경우도 있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가장 많은 수상자가 머무른 곳은 단연 미국이었다. 63명의 이민자 수상자 중 41명이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던 중 노벨상을 받았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막대한 연구비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을 바탕으로 과학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영향이 크다.
올해 노벨 과학상에서도 이민자 과학자들의 활약이 주목받았다. 화학상 수상자인 오마르 야기(Omar M. Yaghi)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는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번에 요르단 출신 최초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됐다.
야기 교수는 노벨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과학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평등의 힘"이라며 "지식의 확산은 종종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은 우리가 서로 대화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막을 수는 없다"며 "열린 사회는 이를 장려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물리학상을 받은 미셸 드보레(Michel Devoret) 예일대 교수와 존 클라크(John Clarke) UC버클리 교수 역시 각각 프랑스와 영국 출신이지만 현재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야기 교수와 함께 화학상을 받은 리처드 롭슨(Richard Robson) 호주 멜버른대 교수는 영국에서 태어나 현재 호주에서 활동 중이다.
국경을 넘어 연구한 과학자들이 노벨상 무대의 중심에 서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1903년 노벨 물리학상,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이나 강굴리(Ina Ganguli) 미국 매사추세츠대 교수는 네이처에 "재능은 어디에서나 태어나지만, 기회는 그렇지 않다"며 "우리가 외국 출신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보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과학의 이동성이 위협받고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연구비 삭감을 추진하면서 두뇌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해부터 외국 연구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H-1B 비자 신청 비용이 10만달러(약 1억 4000만원)에 달해 연구자들의 부담이 급증했다. 호주 역시 외국인 유학생 수를 제한하고, 일본은 해외 대학원생에 대한 재정 지원 축소를 추진 중이다.
네이처는 반면 프랑스와 한국, 캐나다 등은 미국 연구자 유치를 위한 장학금과 연구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유럽연구위원회(ERC)는 연구실을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전하는 과학자에게 최대 200만 유로(약 32억 8000만원)의 연구비를 제공한다.
캐롤라인 와그너(Caroline Wagner)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명예교수는 "미국의 현재 정책은 혁신적 연구의 속도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강굴리 매사추세츠대 교수는 "과거 독일과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정치적 변화 속에 대거 이주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이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덴마크, 네덜란드를 거쳐 현재 영국에서 연구 중인 201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안드레 가임(Andre Geim) 맨체스터대 교수는 "한 곳에만 머무르면 절반의 기회를 잃는다"며 "새로운 환경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는다"고 말했다. 그는 "국경을 닫는 나라는 결국 스스로 발전의 기회를 줄이는 셈"이라고 했다.
참고 자료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5-032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