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거주하는 김모(여·47)씨 부부는 지난 5년간 외아들이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도록 했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의 키는 167㎝로 또래 평균(168㎝)에 조금 못 미친다. 하지만 치료 시작 전에는 평균보다 작았다고 한다. 김씨는 “부모가 크지 않은 키여서 일찍부터 전문 병원을 찾아갔다”며 “한 달에 수십만 원의 비용이 들고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도 힘들지만 170㎝가 될 때까지는 치료를 계속 받고 싶다”고 했다.
자녀의 키를 위해 성장호르몬 치료를 원하는 부모가 늘면서 관련 치료제 생산액이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8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공개한 ‘2024 식품의약품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국내 의약품 생산액 통계에서 성장호르몬 치료제 2종이 2, 3위에 올랐다.
◇연 생산액 2800억 넘어선 성장호르몬
이날 식약처가 발표한 최신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동아ST의 성장호르몬제 ‘그로트로핀’의 생산액은 1483억원으로 셀트리온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램시마(2323억원)에 이어 둘째로 생산액이 많은 치료제로 집계됐다. 그로트로핀은 2021년까지만 해도 의약품 생산액 순위에서 20위권에 들지 못했는데 2년 만에 2위로 올라왔다. LG화학의 성장호르몬제 ‘유트로핀’은 이번 통계에서 생산액 1369억원으로 3위로 기록됐다.
두 성장호르몬제 생산액을 합하면 2800억원이 넘는다. 유럽에서 자가면역치료제 1위인 램시마 생산액을 뛰어넘는 규모로, 성장호르몬 치료제의 성장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성장호르몬 시장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유트로핀의 경우 2020년 생산액은 628억원으로 전체 순위에서 12위였는데 3년 사이에 3위로 뛰어올랐다. 2021년까지만 해도 20위에 못 들었던 그로트로핀은 2년 만에 2위로 올라섰다. 동아ST 관계자는 “성장호르몬제 시장이 전체적으로 커지면서 그로트로핀도 같이 성장했다”며 “2019년 터너 증후군으로 인한 성장부진, 2020년 저신장 소아의 성장 장애 등 적응증을 추가로 획득해 사용 범위가 확대된 것도 성장 요인으로 꼽고 있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성장호르몬 치료가 입소문을 타면서 보험 급여 대상이 아닌 일반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성장호르몬을 맞아 시장 규모가 급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장호르몬 치료를 보험 급여로 받으려면 또래 기준 키가 하위 3%에 해당하고, 성장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분비되는 등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지난해 보건복지위원회 국정 감사에서는 성장호르몬 치료제 급여 처방 비율이 3%에 불과하고, 97%가 비급여 처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성장호르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도 늘고 있다.
◇“키·눈·치아 교정 3종 세트 유행"
통상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예측 키보다 4~5㎝가량 더 크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모두가 100%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또 관절이나 척추에 문제를 일으키는 부작용이 보고되기도 했다. 식약처는 지난해 성장호르몬 주사의 오남용에 대해 “반드시 허가 범위 내에서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아·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전문 병원이 생겨나는 분야는 성장호르몬 치료제뿐이 아니다. 안경 대신 교정 렌즈 등으로 시력 교정을 전문으로 하는 안과도 증가 추세다.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투명 소재로 치아 교정을 전문으로 하는 치과도 인기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12세 미만 어린이들 중 교정 치료를 받았다는 비율이 2018년 5%에서 2022년 8%로 늘었다.
김씨 부부는 “요즘 유아·청소년 부모들 사이에서는 성장호르몬 치료나 치아 교정, 시력 교정 등이 필수로 자리 잡은 분위기”라며 “이 3종 세트 중에 하나도 필요 없는 아이를 ‘유니콘’이라고 부를 정도”라고 말했다.
다만 치아 교정과 시력 교정 또한 100% 효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한 제약 업계 관계자는 “워낙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다 보니 ‘골든 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부모들의 우려가 점점 커지는 것 같다”며 “시력 저하나 부정 교합이 있다면 치료를 받는 게 좋겠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