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화 전문 스타트업 캐럿펀트의 이건우 대표와 서현주 최고운영책임자(COO)./홍아름 기자

2023년 경상북도 경주 배동에서 통일신라 시대 고분이 하나 발견됐다. 겉의 테두리부터 안쪽까지 돌로 쌓아 올린 ‘석실분’이었다. 약 1000년 전 신라인들이 남긴 이 무덤은 당시의 축조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이 고분은 디지털 기록화 기술을 거쳐 3차원 모형으로 복원됐다. 석실의 굴곡부터 벽돌 하나하나의 질감까지 화면 위에 정밀하게 재현된 모습은 실제 현장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디지털 기술을 만나 재탄생한 것이다.

지난 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화 전문 스타트업 캐럿펀트(Carrotphant)의 이건우 대표와 서현주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디지털 기록화는 과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방식을 바꿔놓고 있다”며 “신라시대 토기와 같은 작은 유물부터 큰 규모의 고분까지 3차원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고학에서 유물이나 유적의 구조와 규모를 파악하는 실측(실제 측량) 작업은 필수다. 기존 방식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유물의 가로, 세로, 높이를 일일이 측정한 뒤 방안지 위에 선을 그려 재현하는 수작업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의 토기 ‘이단 투창 고배’만 보더라도 전체적인 모양부터 바닥에 뚫린 창과 문양까지 측정해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단 투창 고배는 하단에 창이 2단으로 나 있는 얇고 납작한 그릇이다.

한지선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사는 “작은 유물이라도 하루에 최대 2점밖에 실측할 수 없다”며 “사람이 직접 그리는 방식이라 연구자의 숙련도에 따라 정밀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신라시대 토기 '이단 투창 고배'를 3차원 모형으로 구현한 모습. 유물을 직접 자르지 않아도 단면을 볼 수 있다./캐럿펀트

이건우 대표와 서현주 COO는 동국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며 직접 실측 실습을 경험했다. 이 대표는 “학부 과정 때 전통 실측 방식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조금 더 간편하면서도 정확한 실측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대학교 2학년 때 창업을 결심했고, 2년 반 동안 소프트웨어 공학을 독학하며 디지털 실측 기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캐럿펀트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아치쓰리디 라이너(Arch3D Liner)’는 포토 스캔, 광학식 스캐너, 레이저 스캐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얻은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통합해 유물의 3차원 모형을 만든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유물부터 복잡한 문양이 들어간 유물까지 15분 이내에 구현할 수 있다. 이날 본 이단 투창 고배의 3차원 모형에는 토기를 빚는 과정에서 생긴 울퉁불퉁한 표면과 문양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다.

3차원 모형은 게임 캐릭터를 돌려보듯 이리저리 돌려가며 관찰할 수 있고, 단면을 분석하거나 곡률을 확인하는 정밀한 작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클릭 한 번으로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자나 문양을 종이에 그대로 떠서 사본을 만드는 ‘탁본’ 작업을 하거나, 문양을 추출해 분석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캐럿펀트의 기술로 구현한 경주 배동 석실분./캐럿펀트

캐럿펀트의 기술은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5′에서 문화유산 분야로는 유일하게 혁신상을 받았다. 이건우 대표는 “단순한 도면화를 넘어 시각화와 이미지 처리 기술을 인정받은 것이 큰 성과”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현재 이 기술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와 서울대 박물관,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 등 테스트베드에서 시험 운용되고 있다. 임종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장은 “문화유산 분야는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한데, 캐럿펀트의 기술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며 “문화유산뿐 아니라 자연유산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캐럿펀트의 소프트웨어는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일본과 유럽에서 국제 특허를 획득하며 세계 시장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일본은 과거 한국이 실측 기술을 배워온 대표적인 나라다. 수십 년이 지나 한국에서 개발한 디지털 실측 기술을 일본에 역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셈이다.

이건우 대표는 “초기에는 문화유산 기록화에 주력했지만, 치아 모형 제작이나 건설 현장의 구조 기록 등 다른 분야에서도 수요가 많다”며 “한국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세계 각국으로 기술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