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철원

23일 정부세종청사 인근에서 열린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기자 간담회. 유 장관은 “양자 기술이 현실화되면 파급력이 굉장히 크다”며 “우리는 양자 전문 인력이 경쟁국에 비해 적은 편이고, 양자 관련 생태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인재 유치와 육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양자 기술 상용화를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것이다.

장관이 직접 ‘양자 기술 경쟁’에 경고음을 울렸지만, 정작 정부의 관련 정책은 사실상 멈춰 있다. 양자 과학 기술 정책의 최고 심의 기구인 양자전략위원회는 출범조차 못 하고 있다. 양자뿐 아니라 바이오, AI(인공지능) 등 국가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기술들이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정국으로 인한 리더십 공백으로 발목 잡혀 있다. 최재식 KAIST 교수는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첨단 기술 컨트롤 타워는 여야가 극한 갈등으로 치닫는 정치 상황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첫발도 못 뗀 바이오·양자 위원회

정부가 ‘3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기존 시장의 흐름을 뒤집는 요소)’ 기술로 선정한 첨단 바이오, 양자, AI 및 반도체 분야의 국가위원회 출범이 기약 없이 미뤄지거나, 시작 직후부터 개점휴업 상태에 놓였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세운 국가 차원의 전략위원회 중에서 첫 삽을 뜬 곳은 지난 9월 출범한 국가인공지능위원회뿐이다.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한 국가바이오위원회와,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양자전략위원회는 당초 이달 출범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무기한 연기됐다. 탄핵 정국의 흐름에 따라 내년 하반기로 미뤄지거나, 위원회 발족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국가바이오위원회는 제약·바이오 연구개발(R&D) 지원을 통한 블록버스터 신약(연 매출 1조원 이상인 신약) 개발 등을 목표로 한다. 대통령 직속으로 기획재정부·과기정통부·보건복지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 수장 10명과 국가안보실 제3차장 등이 위원으로 들어가는 범부처 조직이 될 예정이었지만 향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정부가 내년에 투입한다고 공언했던 바이오 분야 연구 개발(R&D) 예산 2조 1000억원 또한 제대로 집행될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최대 제약 바이오 시장인 미국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 한국도 적극적인 정책 개입이 필요한데 컨트롤 타워가 사실상 없는 상황에 환율까지 치솟아 업계 타격이 크다”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양자 기술 분야를 총괄할 양자전략위원회도 연내 출범이 어렵게 됐다. 위원회 신설에 관한 법령이 지난달 시행됐으나 위원장을 맡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서 양자전략위원회는 우선순위에서 밀린 상태다. 이달 초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위원회 출범을 위한 정부 내부 회의가 두 차례 미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 기간에 미국에서는 구글이 최신 양자 칩 ‘윌로’를 공개했고, 중국도 비슷한 성능의 양자 칩 ‘주충즈 3.0′의 연구 개발 결과를 선보였다.

◇AI·우주 분야도 주춤

국가인공지능위원회는 내년도 예산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과기정통부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한 지난 9월 2일 이후에 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정부안에 관련 내용을 담지 못했고, 상임위에서 증액 논의가 이뤄졌지만 결국 예산 확보에 실패했다. 법적 근간이 되는 ‘AI 기본법’이 앞으로 본회의를 통과하면 법정 기구로 승격되지만, 위원회의 예산 확보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국가인공지능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위원회 홈페이지는 아직 구축 중이다. 이날 유상임 장관은 “추경을 하게 된다면 최우선 순위는 AI 분야”라고 했다.

올해 우주항공청이 문을 열며 본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던 우주 분야도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우주청 관계자는 당초 이달 말 열릴 예정이었던 제3회 국가우주위원회 회의가 미뤄졌다고 23일 밝혔다. 국가우주위는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제1차 회의를 가졌고, 지난달 2차 실무진 회의 이후 3차 회의는 이달 대통령 참석 회의로 열 예정이었지만 무기한 연기됐다. 국가우주위는 윤석열 대통령 외에도 당연직 위원인 국방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모두 탄핵 여파로 공석이 된 상황이다. 3차 회의에서는 한국의 첫 번째 달 착륙선 개발 계획 등이 논의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주청 관계자는 “중요한 문제가 쌓여 있어 내년 초에는 회의를 열어야 할 것으로 본다”면서도 “지금은 (회의 개최 시기를)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