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한국은 내년부터 유럽연합(EU)의 연구 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한다고 발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호라이즌 유럽 가입을 올해 주요 성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호라이즌 유럽에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면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바로 젠더(gender) 혁신 문제다. 젠더 혁신은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에서 성별과 같은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특정 인구집단에 대한 데이터 편향을 줄이고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는 연구 방식이다.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18일 오후 열린 국제젠더혁신심포지엄에서 시그네 랏소(Signe Ratso) 유럽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 부총국장은 “기후변화, 디지털 전환, 사회 형평성과 같은 글로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과 성별의 연구자들이 협력해야 한다”며 “다양한 구성을 가진 팀이 포용성에 탁월하며 효과적인 혁신을 일으킨다”고 젠더 혁신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랏소 부총국장에 따르면 EU의 ICT 분야 박사학위 취득자 중 22%만이 여성이다. 공학은 30% 미만에 불과하다. EU에서 특허를 출원하는 연구자 중 여성은 10% 미만이다. 랏소 부총국장은 “모든 경력 단계에서 여성의 비율은 낮다”며 “이 문제는 전 세계 공통 과제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라이즌 유럽을 총괄하는 유럽집행위원회 연구혁신총국은 젠더 혁신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2022년부터 호라이즌 유럽의 기금을 신청하는 연구 기관은 성평등 계획(GEP)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 랏소 부총국장은 “연구기관 내 구조적 장벽을 허물고 포용성을 촉진하기 위함”이라며 “실제로 계획을 잘 갖춘 곳에서는 여성의 근무 조건은 물론 전체적인 생산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의료분야에서 보면 초기 임상 시험에서 여성을 배제하다 보니 나중에 대규모 인구에 대한 치료 효과가 떨어지거나, 심지어 뒤늦게 약물이 여성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연구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성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랏소 부총국장은 “한국은 이미 과학, 혁신 분야에서 성평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젠더 혁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글로벌 협력에 나서야 한다”며 “성평등 달성을 위한 협력에 참여하면 과학적 진보뿐 아니라 사회적 포용도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호라이즌 유럽에 참여하며 성평등 계획을 수립한 영국 연구혁신청의 조나단 도스(Jonathan Dawes) 부집행위원장은 영국의 젠더 혁신 현황에 대해서 발표했다. 도스 부집행위원장은 “영국 연구혁신청 중에서도 보건 분야를 담당하는 의료연구위원회(MRC)는 연구 계획에서의 젠더 혁신을 위해 힘쓰고 있다”며 “연구에서 동물 또는 동물 유래 조직을 사용할 경우 양성의 것을 사용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도록 한다. 동시에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스 부집행위원장은 “MRC에서 진행된 논의를 다른 분야의 정책에도 적용해 나갈 것”이라며 “성평등 계획에 있어 리더십과 관련 자원 확보, 데이터 수집, 분석, 실천의 다섯 가지 요소가 주요한데, 이 중에서도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