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13일 올해 최고의 연구 성과(breakthrough of the year) 10개를 소개하면서 과학이 실패(Breakdowns)한 순간도 꼽았다.
사이언스는 가장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도 제2, 제3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확산을 막지 못한 것을 과학의 실패로 꼽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이후 같은 사태를 반복하지 않도록 감시를 강화하고, 백신과 치료제, 진단 도구에 대한 접근성 강화, WHO 역량 강화 등 대책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런 후속 조치에도 불구하고 올해 고병원성 H5N1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미국에서 전례 없이 확산했다. 인간에게 감염된 확인된 사례만 58건에 달한다. 사이언스는 “미국이 사태를 수습하고 데이터를 공유하는데 미온적이었다”며 “코로나19 초기 중국의 대응과 비교되면서 질타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판되는 비살균 우유에서 H5N1 바이러스가 검출되기도 했다.
엠폭스(MPOX·옛 명칭 원숭이두창)가 올해 콩고민주공화국과 인접 국가에서 유행하면서 전 세계 보건 당국이 긴장했다. 불과 2년 전에 다른 변종 엠폭스 바이러스가 유행했지만, 콩고에는 여전히 엠폭스 백신이 없어 가장 취약한 어린이들은 전혀 예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팬데믹 조약 협상은 부유한 나라와 빈국 사이의 분열로 교착 상태다. 사이언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 합의를 무산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미국 보건당국 수장으로 백신 회의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임명되면서 전 세계 보건 당국이 더욱 긴장하고 있다.
전쟁도 과학을 후퇴시켰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는 2년간 민간 연구비를 25% 삭감하기로 했고, 러시아 국가 과학기관의 고용 인력도 6%가 줄었다. 우크라이나는 많은 연구 시설이 전쟁으로 파괴됐다.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12개 대학 캠퍼스가 파괴됐다. 국내총생산(GDP) 약 5.5%를 연구에 투자하던 이스라엘은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향후 2년간 고등교육 예산을 5% 삭감할 계획이다.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가 경제 안정화를 명목으로 연구 예산을 31% 삭감했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과학 기관인 국립과학기술연구위원회(CONICET)는 1000명의 인력을 잃은 상태다.
기후 변화와 생물다양성,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전 세계적인 협상도 진전이 없었다. 지난달 24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폐막한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는 부유국이 2035년까지 연간 3000억달러의 재정 지원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 금액은 개도국이 요구한 연간 1조3000억달러에는 크게 못 미친다. 파나마의 기후 대사는 이번 결과를 “완전한 실패”라고 평가했다.
지난 10월 콜롬비아 칼리에서 열린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회의도 재정적 기반 마련을 위한 재원 규모 등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채 끝났다. 이번 달 한국 부산에서 열렸던 플라스틱 조약도 산유국의 반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빈손으로 마무리됐다.
사이언스는 MDMA(엑스터시)를 환각제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위한 의약품으로 격상하려는 노력이 실패한 것도 과학의 실패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 제약사 라이코스 테라퓨틱스는 MDMA를 PTSD 치료제로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2023년 12월 미 식품의약국(FDA)에 신청했다. 하지만 FDA는 지난 8월 승인을 거부했고 추가 임상시험을 요구했다.
사이언스는 환각제를 의약품을 활용하기 위한 시기가 늦춰질지언정 완전히 무산된 건 아니라고 평가했다. MDMA의 승인 여부가 실로시빈(psilocybin)이나 디메틸트립타민(DMT) 같은 다른 환각 물질이 정신건강 치료 약물로 인정받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v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