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연구프로젝트인 글로벌 항생제 내성 연구(GRAM)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21년까지 다제내성균 감염으로 매년 100만명 이상의 환자가 숨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50년에는 다제내성균 감염 사망자 수가 1000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내놨다.

다제내성균은 여러 종류의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박테리아(세균)를 말한다. 세균 감염은 항생제가 듣지 않으면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 질병관리청의 ‘항생제 내성 감시체계(GLASS)’에 따르면 국내에서 시프록사신은 41.3%, 세포탁심은 38.8%, 겐타마이신은 23.3%의 내성률을 갖고 있다. 동시에 국내 항생제내성균 감염 사망자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국내에서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돼 사망한 환자는 2022년 539명으로 2017년 37명 대비 14배 늘었다.

항생제 내성균과의 전쟁에서 한국인 과학자들이 선봉에 서고 있다. 폴 볼리키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28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항생제 내성을 가진 녹농균과 황색포도상구균을 죽이는 박테리오파지 ‘KOR-P1′과 ‘KOR-P2′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한인 과학자인 김민영 미국 예일대 전공의(당시 스탠퍼드대 연구원)가 참여해 한국(KOREA)을 의미하는 이름이 붙었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 산하 국립감염병연구소 연구원이 박테리오파지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박테리오파지는 박테리아(세균)에 유전물질을 주입한 후 증식해 터뜨리고 나온다. 항생제를 대신해 세균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으로 최근 주목 받고 있다./질병관리청

◇녹농균·포도상구균 잡는 박테리오파지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에 감염돼 증식하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동물 세포에 감염되는 일반적인 바이러스처럼 자신의 유전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DNA)을 세균에 주입해 증식한 후, 세균을 터뜨리고 나오면서 생을 이어간다.

박테리오파지는 항생제를 대체할 새로운 치료법으로 최근 주목 받고 있다. 항생제는 생물학적으로 증식과 생존에 필요한 회로를 막아 일부 살아남은 세균이 필연적으로 내성을 갖는다. 반면 박테리오파지는 물리적으로 세균을 터뜨려 죽인다. 이론적으로 내성이 나타나기 어렵다.

연구진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결핵의 치료법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종류의 박테리오파지를 섞어쓰는 칵테일 요법을 개발했다. 칵테일 요법은 바이러스나 세균의 생존과 증식에 필요한 여러 경로를 동시에 차단하는 약물을 함께 써 치료 효과를 높이는 방식이다.

연구진은 감염병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세균인 녹농균과 황색포도상구균을 죽일 수 있는 박테리오 파지를 새롭게 찾아냈다. ‘KOR-P1′과 ‘KOR-P2′로 이름 붙은 이 박테리오 파지는 녹농균에 대해 96%, 황색포도상구균은 100%에 가까운 치료 효과를 보였다.

김민영 전공의는 “박테리오파지는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나 연구소에서 이름을 짓지만,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며 “미래에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치료제가 나왔을 때 한국이 얼마나 기여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박테리오파지 칵테일 요법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동물 실험을 진행했다. 생쥐에게 상처를 낸 후 녹농균과 황색포도상구균에 감염시켰다. 세균들은 스탠퍼드대 병원에 방문한 환자에게서 수집했으며, 모두 항생제 내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2시간과 24시간 후 두 종류의 박테리오파지를 섞어 주입한 후 치료 효과를 확인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생쥐에게서 감염 증상이 사라지며 감염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확인됐다.

김민영 전공의는 “다제내성균 감염증은 물론 기존 항생제로는 치료가 어려운 난치성 감염병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양한 박테리오파지를 조합해 사용하는 만큼 내성이 나타날 우려도 상당히 낮다”고 말했다.

박테리오파지(빨간색)가 대장균의 세포를 뚫고 나오는 모습. 박테리오파지는 박테리아(세균)의 천적으로 항생제를 대체할 것으로 제약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단백질 데이터베이스(PDB)

◇항생제 개발 중단하는 빅파마들, 박테리오파지 주목

박테리오파지는 제약업계에서도 항생제를 대체할 물질로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최근 항생제 개발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항생제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항생제를 개발하더라도 빠르게 내성이 생겨 사용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탓이다.

화이자는 2019년 폐질환용 항생제 개발 기업 AN2 테라퓨틱스의 에페트라보롤의 개발권을 사들였으나, 최근 임상시험을 중단을 선언했다. 노바티스도 2018년 항생제 개발을 중단하고 항암제를 비롯한 고수익성 의약품 개발에 집중한다고 발표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사노피도 각각 2016년과 2018년 항생제 개발을 중단했다.

반면 박테리오파지 감염병 치료제 연구에 도전하는 기업은 늘고 있다. 국내에서는 마이크로바이오틱스가 대표적이다. 마이크로바이오틱스는 다제내성을 보이는 녹농균을 죽이는 박테리오파지 ‘MP001′와 다제내성 대장균을 죽이는 ‘MP002′을 개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인트론바이오, 지놈앤컴퍼니 등이 박테리오파지 개발에 도전 중이다.

의료계도 박테리오파지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신원 부산대 교수가 2024년 국내 감염병 관련 전공의와 전문의 9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참가자의 93.5%가 다제내성균 치료를 위해 박테리오파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김민영 전공의는 “미 식품의약국(FDA)이 박테리오파지를 ‘맞춤형 생물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있어 허가 절차가 일반 의약품보다 더 복잡하다”며 “표준화된 임상 절차 개발과 환자군 선정 등 연구어려운 점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KOR-P1과 KOR-P2를 이용한 치료제의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호흡기, 피부, 골격계 감염에 대해 효능을 검증할 예정이며,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난치성 감염증에도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참고 자료

Nature Communications(2024), DOI: https://doi.org/10.1038/s41467-024-53994-9

Infect Chemother(2024), DOI: https://doi.org/10.3947/ic.2024.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