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약·바이오 업계를 강타한 트렌드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다. 헨리 체스브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2003년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기업이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연구부터 상업화까지 다른 기업과 자원을 공유하고, 혁신을 위한 기술과 아이디어도 외부의 다른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가져오는 방식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자리 잡으면서 기업이 내부에서 폐쇄적으로 연구하던 시대보다 생산성도 높아졌다. 글로벌 회계법인 딜로이트가 1998~2012년 신약을 개발한 281개 글로벌 기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오픈이노베이션 방식의 신약 개발은 성공률이 34%에 달한다. 반면 한 기업 내부에서만 이뤄진 연구는 성공률이 11%에 머물렀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성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어 제약 산업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로슈도 오픈 이노베이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스위스 바젤에서 만난 마이클 존스턴 로슈진단 아시아태평양 전략·제휴팀 리드는 “로슈는 전 세계적으로 10만명에 달하며, 산하 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한 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 있다”며 “그럼에도 다른 기업과의 협력에서 나오는 혁신적인 성과는 내부의 성과를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존스턴 리드는 로슈진단에서 아태 지역을 맡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아태 지역에서 지사 16개사와 함께 협력할 기업을 찾고 있다. 특히 아태 지역은 로슈진단의 오픈 이노베이션 담당 부서에서 70여명이 일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로슈진단은 ‘과학 우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아태 지역에 주목하고 있다. 존스턴 리드는 의료진의 결정 중 70% 이상이 진단 결과에 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진단 기술에서 기술력과 신뢰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태 지역이 우수한 기술을 갖춘 국가들이 밀집한 곳으로 평가됐다. 그는 “한국은 글로벌 혁신지수(GII) 상위 10위권에 드는 국가이고, 인접한 다른 국가 5곳도 상위 25위 내에 포함돼 있다”며 “아태 지역이 로슈에게 중요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한국 기업이 로슈의 과학 우선주의 철학과 맞아 떨어지는 협력 파트너라고 평가했다. 존스턴 리드는 “한국의 바이오 스타트업들은 해외 기업과 견줘 동등하거나 더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며 “환자에게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목표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슈진단은 2017년 디지털 진단기술 종합 브랜드인 ‘네비파이(Navify)’를 출시하고 혁신적인 기술을 가진 전 세계 스타트업과 협력하고 있다. 현재까지 8개사가 네비파이에 참여했으며, 그중 루닛과 딥바이오가 한국 기업이다. 존스턴 리드는 “진단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와 환자가 진단 결과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며 “로슈도 협력할 스타트업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가 제품의 품질과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로슈진단은 기술력을 가진 한국 바이오 기업의 육성을 지원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뉴로핏은 지난해 9월 한국보건산업진흥원(KHIDI)의 글로벌 연구협력 지원사업에 참여해 임상시험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뉴로핏은 뇌 영상 분석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다.
존스턴 리드는 “로슈진단의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은 스타트업이 가진 알고리즘과 바이오마커(생체 지표)와 로슈진단의 마케팅, 규제 지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바이오마커는 단백질이나 디옥시리보핵산(DNA), 리보핵산(RNA)처럼 신체 변화를 알아낼 수 있는 생체 물질을 말한다. 진단 정확도는 환자의 상태를 잘 나타내는 바이오마커를 발굴하고, 그 변화를 얼마나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는 “로슈진단은 전 세계에 10만대 이상의 진단 분석 기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스타트업들은 로슈진단의 인프라(기반 시설)를 활용할 수 있다”며 “좁은 지역에만 국한된 기업들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도움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