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인가족 김장 비용은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한국물가정보에 따르면 전통시장에서 4인 가족용 김장 식재료를 구매하는 비용은 33만1000원으로 작년보다 10% 늘었다. 무 가격이 작년보다 2배 올랐고, 쪽파, 배추도 가격이 크게 올랐다. 폭염과 폭우 등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채소 작황이 좋지 않은 탓에 김장 물가도 치솟은 것이다.
기후변화가 전 세계 농업 경제를 흔들고 있다. 단순히 물가의 문제가 아니라 식량 위기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위기감이 크다. 영국은 지난 1년 동안 감자 가격이 20%, 당근은 38% 오르면서 일상적인 식비가 급등했다. 북유럽 지역은 올해 봄철에 폭우가 내리면서 채소 농사를 짓는 밭이 대부분 망가졌다. 반대로 유럽에 많은 채소를 수출하는 모로코는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다.
과학계는 기후변화가 유발한 식량 위기를 생명공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영국의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는 지난 13일 과학계의 의견을 전하며 “유기농 식품이 지구에 좋고, 유전자 변형(GM) 작물은 지구에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됐다”며 “이런 생각은 더 많은 파괴와 굶주림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연 상태 그대로의 유기농 농업으로 기후 변화에 대응해 생산량을 늘리려면 더 많은 경작 면적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아마존의 숲이 빠르게 농경지로 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농업을 비롯한 식량 생산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 기후변화가 이 비율을 더 높이고 있다.
생명공학은 숲을 파괴하지 않고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릴 유전자변형작물(GMO)에 이어 특정 유전자만 조절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유전자교정작물(GEO)까지 발전시켰다. 식량 위기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농작물을 통해 건강 기능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수입에 의존하는 식량 자급 열등생 한국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4.4%, 곡물자급률은 20.9%다. 식량자급률은 사료를 제외한 곡물을 의미하는데, 둘 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내리막이다. 한국은 곡물 수요량 2266만t 중 1786만t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 멕시코 등에 이어 세계에서 7번째 곡물 수입국이다.
대두(콩)와 옥수수의 자급률은 각각 5.9%, 0.8%로 사실상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의 세계식량안보지수는 2022년에 70.2점으로 39위였다. 2012년 21위에서 빠르게 순위가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 워낙 경지면적이 적은 탓에 식량과 곡물의 수입 의존도가 클 수밖에 없다. 국내 전체 농업용지는 155만ha(헥타르·1㏊는 1만㎡)인데, 여기에 전부 옥수수만 심는다고 해도 2021년 한국이 수입한 옥수수 1165만t의 85%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다.
한국의 식량 위기는 하루이틀 된 문제가 아니지만,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처럼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동유럽 흑해 지역은 북미의 프레리와 남미 팜파스와 함께 세계 3대 곡창 지대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 지역에서 곡물 수급이 불확실해지면서 한국의 곡물 수입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기후변화는 한국에 기호식품 인플레이션도 초래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병충해와 바이러스가 기호식품 원료 작물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와인 생산국이었던 이탈리아는 포도에 곰팡이병인 노균병이 번지면서 작년 와인 생산량이 23.2% 줄었다. 서아프리카 지역 4개국에서 생산되는 코코아가 가뭄과 폭우,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 초콜릿 가격이 급등하기도 했다.
◇첨단 기술로 식량 위기 돌파구 찾아
첨단 생명공학기술은 기후변화 위기의 새로운 해결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의 연구진은 대두의 광합성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수확량을 높이는 실험을 진행했다. 유전자 변형이나 교정 기술을 이용해 작물이 가뭄이나 병충해에 더 잘 견디게 하는 연구 결과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되고 있다.
GM 작물은 GMO와 GEO를 모두 일컫는 개념이다. GMO는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종자에 넣어 새 특성을 갖게 만든 작물을 말하고, GEO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활용해 식물의 유전자 DNA 염기서열 중 일부분만 바꾼 작물을 말한다.
곽상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식물시스템공학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공학 작물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제초제 저항성을 가진 GM 콩과 해충 저항성 GM 옥수수가 1996년 이후 본격적으로 재배된 이후 아직까지 인체나 환경에 문제가 된다는 보고는 없었다”고 말했다.
곽 책임연구원은 “오히려 GM 작물이 농약을 적게 쓰고 생산량을 늘리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였다는 사례가 많다”며 “최근 미국 코넬대 연구팀이 온실가스를 다량 배출하는 질소비료를 쓰지 않고도 생산량을 유지하는 유전자 교정 벼를 개발했는데, 이런 기술이 널리 확산되면 기후위기 시대 작물 재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도 GM 작물을 받아들였다. 국내에서는 아직도 GMO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만, 해외에서는 GMO 작물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대두, 옥수수, 면화 카놀라, 사탕무, 감자, 호박, 사과, 가지 등 수많은 작물이 GMO 기술로 생산되고 있다. 전 세계 생명공학작물 재배면적은 2000년 4420만ha에 불과했지만, 2019년에는 1억9040만ha로 늘었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인 미국은 대두, 옥수수, 면화, 카놀라의 92~97%가 생명공학작물이다.
한국도 GMO 주요 수입국 중 하나다. 2021년 기준으로 국내에 수입된 GMO 작물은 1115만t으로 전체 곡물 수입량의 62.2%에 달했다. 사료용 옥수수가 923만t으로 83%를 차지했고, 면화나 대두, 식품용 옥수수도 적지 않게 수입하고 있다. 주로 미국과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GMO 작물을 수입하고 있다.
하상도 중앙대 식품공학부 교수는 “가뭄에 잘 견디는 곡물이나 비타민을 강화한 쌀, 알르레기 물질이 제거된 콩 등 생명공학 연구의 산물은 곳곳에 있다”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 먹는 곡물은 자연적인든 인위적이든 모두 GMO의 산물이라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규제 푸는 해외, 빗장 잠근 한국
기후 위기가 일상화되면서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규제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GM 식물이 상용화된 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환경이나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서 많은 국가들이 GMO 재배 면적을 늘리고 있다. 최근에는 다른 개체의 외래 유전자를 삽입하지 않고 작물 자체의 유전자를 일부 수정하는 GEO 기술이 등장하면서 규제 완화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GMO의 경우 작물에 대한 위해성 평가에만 수년이 걸린다. 위해성이 입증된 경우가 없지만, 만에 하나 환경이나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몇 년에 걸친 위해성 평가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GMO는 개발 기간만 8~12년이 걸리고, 개발 비용도 높다. 반면 GEO 기술은 작물 자체의 유전자를 바꾸기 때문에 자연적인 돌연변이와 다를 게 없다. 위해성 평가도 그만큼 간단해 개발 기간이 4~6년 정도로 짧고 개발 비용도 많지 않다.
생명공학 기술이 중요해지면서 전 세계가 GM 작물에 대한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 지역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 지역은 GM 작물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GEO 기술에 대해서는 GMO와 구분해 별도로 규제하지 않는다. 러시아나 호주도 마찬가지다.
유럽도 GEO에 대한 규제 완화로 돌아섰다. 유럽연합(EU)은 작년부터 GEO에 대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식품안전청(EFSA)이 GEO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면서 규제 완화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환경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정책을 펴는 뉴질랜드도 GEO에 대해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다. 세계종자협회(ISF)에 따르면 전 세계 주요국 중 GEO를 GMO와 동일하게 규제하는 국가는 이제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만 남았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GEO를 포함한 GM 작물에 대해 전향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영희 전남대 생명과학기술학부 교수는 “GM 작물이 전 세계 식량 위기 해결에 큰 기여를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생명공학 기술을 중요하게 인정하고 규제를 풀고 있다”며 “작물이 안전한지를 보고 판단을 해야 하는데, GM 작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프레임만 씌워서 개발을 막으면 한국 종자 시장을 외국에 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 생명공학 분야 원로인 유장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장도 “1996년 이래 28년 동안 전 세계에서 GM 작물이 재배됐지만 단 한 건도 환경 위해성이 발견되지 않을 만큼 안전성이 증명됐다”며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폭넓은 재배를 허용하고 있는 GEO 작물에 대해 즉각적인 재배 허용이 이뤄져야 하고, 실증적으로 안전성이 확보된 GMO 정책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GEO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국제적인 통상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국은 GEO 작물을 GMO와 따로 구분하지 않고 있다. 국제종자협회와 유럽종자협회, 미국종자무역협회는 GEO를 GMO로 간주하는 건 ‘외래유전자가 포함돼 있지 않은 유전자가위 산물은 자국 유전자변형생물체 관련 규제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카르타헤나 의정서에 반한다고 보고 있다.
생물공학 기업들의 모임인 유전자교정 바이오산업발전 협의회는 “GEO를 GMO와 구분하지 않을 경우, 국제적으로 통상마찰 우려가 있다”며 “한국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고, 응용기술을 가진 뛰어난 연구자가 많아 산업 발전 가능성이 크다. 한국 농업 발전을 위해 GEO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