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교 교무부장이 KAIST 입학처장에게 과학영재들이 내신에만 매달리는 것이 KAIST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 과학고에는 진짜 과학 공부를 하지 않고 사교육에 매달려 내신 성적에만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다. KAIST가 내신 성적으로 조기 졸업자의 진학을 허용하다 보니 대학에 일찍 들어가 반수나 재수를 거쳐 의대로 갈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7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이 주최한 과학영재교육포럼에서 마이크를 잡은 김용현 KAIST 입학처장은 이런 지적에 과학영재교육에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 국민이 사교육을 당연시하고, 과학고나 영재고마저도 사교육에 의존하는 환경이 됐다”며 “과학영재를 성적 순으로 선발했던 KAIST의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김 처장은 “성적 경쟁이 전부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보니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우리가 어떤 학생을 뽑는지 잘 보여줬어야 했다”고 했다. 그는 KAIST가 4년 동안 이 문제를 개선하려고 많이 노력했고, 앞으로 과학고와 KAIST의 이공계 연계 교육을 다시 빌드업(build up, 쌓아가며 완성)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캠퍼스의 거위들. KAIST를 대표하는 명물이자 이광형 총장의 별명처럼 KAIST의 '괴짜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다. KAIST는 입시 제도 변화를 통해 내신 성적 위주의 학생 선발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이 있는 과학영재를 뽑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대전=이종현 기자

KAIST 입학처장의 이례적인 공개 사과가 나온 건 그만큼 지금의 과학영재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날 포럼의 토론자로 나선 심규철 공주대 생물교육과 교수는 과학고의 조기 졸업 제도가 학생들을 과학고 설립 목적에서 어긋난 내신 성적 경쟁으로 내몬다고 지적했다.

심 교수는 “과학고 학생 상당수가 2학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1학년 내신 성적에 좌우되는 조기 졸업 제도 운영은 과학고 설립 취지에 부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과학고 조기 졸업 비율이 일정 수준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그 안에 들어가려고 내신 경쟁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환경에서 과학고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충실한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최호성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도 “과학영재 선발 입시는 학생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대학의 주관적, 전문적인 판단 과정”이라며 “말썽이 없는 입시에서 신빙성 있는 학생 선발 제도로 정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KAIST 역시 이런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김 처장은 “과학고의 조기 졸업과 대학 조기 진학 제도가 애초 목적과 다르게 쓰이고 있다”며 “2026학년도 입시부터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과학고의 조기 졸업과 대학 조기 진학 제도는 과학영재나 이공계 우수학생 양성을 위한 제도지만, 최근에는 의대 진학을 위한 통로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기 졸업과 조기 진학 제도를 활용해 1년 일찍 대학 이공계열에 진학한 학생이 반수나 재수를 해서 의대를 가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정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KAIST와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4대 과기원에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입학한 신입생 중 2학기에 휴학한 학생이 155명에 달한다. 올해 신입생이 1530명이었는데 10명 중 1명은 휴학한 것이다. 1학기에 휴학한 학생까지 합하면 185명으로 늘어난다. 의원실은 내년 의대 정원이 늘어나는 가운데 이 중 상당수가 의대 입학을 위해 휴학했다고 추정했다.

이 의원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의대 증원으로 4대 과기원 인재 유출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올해 4대 과기원 휴학자 수가 185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의대 입시 열풍이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이공계 인재들의 꿈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19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5학년도 수시 대학입학정보 박람회장. 다른 대학 부스가 한산한 반면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의과대학이 있는 대학 부스에는 상담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다./뉴스1

KAIST가 입시 제도를 바꾸는 데에도 이런 문제 의식이 깔려 있다. 김 처장은 2026학년도부터 과학고 조기 졸업자의 조기 진학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대신 과학영재선발제도는 유지해서 재능 있는 이공계 학생은 계속 뽑겠다고 말했다. 과학고의 조기 졸업 제도가 내신 성적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성적 경쟁을 강요하는 반면, 지원서와 자소서 등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과학영재선발제도는 조기 진학의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본 것이다.

새로운 선발 기준도 제시했다. 김 처장은 “수·과학 어느 한 과목이라도 특정학기 석차 백분위가 70~90% 이상인 경우나 전국 단위 이상의 연구 활동 대회 입상 경력이 있다면 기회를 주겠다”며 “과학고와 영재학교의 설립 목적에 맞게 내신 경쟁을 줄이고 탐구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KAIST 교무처장 겸 과학영재교육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홍승범 교수도 KAIST의 변화 의지를 강조했다. 홍 처장은 “KAIST는 지난 몇 년 동안 입학 사정할 때 단순히 성적 순으로 나열해서 뽑는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성적 순으로 나열했을 때 경계에 있는 학생은 좀 더 면밀하게 봐서 자소서나 여러 활동을 따져서 과감하게 뽑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