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책임자인 교수들이 사용하지 않고 쌓아둔 학생인건비 잔액은 교수들의 쌈짓돈이 아닙니다. 정부가 학생들에게 인건비로 지급하라고 배정한 예산이 잠시 개인이나 기관 계정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지난 8월 23일 서울대 해동학술관에서 열린 ‘이공계 대학원 연구생활장려금 대학원생 간담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학생인건비 통합관리제 제도 개선방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몇몇 대학 교수를 비롯한 연구책임자들이 정부의 제도 개선에 반발하자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다시 돌려주는 취지라고 설명한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박 수석의 간담회 이후 두 달 만에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가톨릭대 의생명산업연구원에서 대학 이공계 학생과 연구자, 정부출연연구기관 전문가 등이 모인 가운데 공청회를 열고 정부의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사업 예산에는 학생인건비가 포함돼 있다. 과거 일시적으로 R&D 사업이나 과제가 중단되면서 학생연구자가 제때 인건비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왕왕 생겼다. 정부는 학생연구자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2009년 학생인건비 풀링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이후 학생인건비 통합관리제로 확대됐다.
학생인건비 통합관리제는 연구책임자나 연구기관 단위로 여러 과제의 학생인건비를 통합해서 관리하는 제도다. 예컨대 대학교수 한 명이 여러 개의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 과제별로 받는 학생인건비를 한 곳에 모아서 학생연구원들의 인건비를 지급하는 식이다. 갑자기 과제 하나가 중단돼도 다른 과제에서 나온 인건비를 나눠서 쓸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학생인건비 지급이 가능하다.
지금은 전국에서 65개 기관이 통합관리제를 도입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전국에 200여 대학이 있기 때문에 적어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R&D 사업을 수행하는 대학은 모두 제도를 도입했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통합관리제가 시행되고 10년이 넘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몇몇 연구책임자가 정부 R&D 과제에서 나온 학생인건비를 제때 쓰지 않고 모아두기만 한 것이다. 2023년 기준으로 학생인건비 잔액이 2억원이 넘는 연구책임자가 474명으로 전체의 1.9%에 달했다. 10억원이 넘는 학생인건비를 쓰지 않고 쌓아둔 연구책임자도 10명이나 되고, 한 대학 교수는 50억원을 쌓아두고 있었다.
학생인건비를 적립하는 게 불법은 아니다. 갑자기 연구 과제가 중단되거나 교수가 연구년을 가는 등 여러 상황을 대비해 정부도 일정 부분 적립을 허용하고 있다. 현재는 학생인건비 지급비율을 50%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학생인건비의 절반은 쓰지 않고 적립해도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연구책임자가 과도하게 학생인건비를 쌓아둔다는 점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연구책임자의 65% 정도는 1년치 지급분 미만을 적립해두고 있어 문제가 없지만 나머지 35%는 1년치 지급분 이상을 쌓아두고 있디”며 “몇몇 연구책임자의 경우 은퇴할 때까지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학생인건비를 쌓아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적립된 학생인건비 활용을 촉진해 학생연구자에게 더 많은 급여가 돌아가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학생인건비 1년치 이상을 적립하고 있는 연구책임자를 대상으로 1년치 지급분 초과분의 20%는 회수해서 기관 계정에 이체하도록 할 계획이다. 기관 계정에 모인 돈은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저마다 기준을 세워서 학생연구원에게 지급한다.
예를 들어 한 대학에 있는 A교수의 학생인건비 총수입액이 1억2000만원이라고 치자. 전년도 학생인건비 잔액 6000만원에 올해 새로운 들어온 학생인건비 6000만원이 더해진 돈이다. A교수는 2명의 학생연구원을 데리고 있는데 각각 월 150만원과 월 250만원의 인건비를 주고 있다. 두 학생연구원의 연 학생인건비 총액은 4800만원(1800만+3000만원)이다. 학생인건비를 주고 남은 돈은 7200만원이다.
지금까지는 7200만원이 고스란히 다음 해 학생인건비 잔액으로 적립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7200만원에서 1년치 지급분인 4800만원을 뺀 2400만원의 20%인 480만원을 기관 계정으로 이체해야 한다. 대학 차원에서 480만원을 두 명의 학생연구원에게 다시 분배하면 된다. 학생연구원 입장에서는 급여가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다음 해 학생인건비로 적립되는 잔액은 7200만원에서 480만원을 뺀 6720만원으로 줄어든다.
연구책임자가 1년치 지급분 초과분의 20%를 기관 계정에 이체하기를 거부하거나 연구기관이 기관 계정을 만들지 않을 경우, 이 돈은 그대로 국고로 회수된다. 과기정통부는 연구 현장에서 새로운 제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1년 정도 유예 기간을 준다는 계획이다. 2025년 말 잔액부터 바뀐 제도를 적용한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엄청난 규모의 학생인건비가 기관에 쌓이고만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제도 개선”이라며 “학생인건비 활용을 촉진해서 학생들의 실질적인 처우가 개선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