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18일부터 강릉 분원에서 뇌 신경공학을 주제로 '아슬라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전 세계 뇌 신경공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참석했다./KIST

지난 8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 연구진은 뇌 질환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신경 센서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온몸이 마비되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루게릭병) 환자인 케이시 해럴(Casey Harrell·46)을 도왔다.

해럴은 4년 전 루게릭병에 걸려 안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점차 말하는 능력을 잃고 있었다. UC데이비스 연구진은 해럴의 대뇌 피질에 전극을 이식했다. 그는 안면 근육을 쓸 수 없어 뇌가 신호를 보내도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뇌 신경세포는 계속 얼굴로 전기신호를 보냈다. 전극은 그 신호를 감지했다.

연구진은 해럴의 뇌 신경세포에서 나오는 신호를 포착하면 해럴의 입을 대신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연구진이 만든 장비는 몇 번의 조정을 거친 뒤에 해럴의 일상적인 대화나 어휘를 거의 완전히 학습했다. 지금 해럴은 어려움 없이 가족이나 동료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존 나이(John Ngai) 미 국립보건원(NIH) 브레인 이니셔티브 디렉터는 19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강릉 분원에서 열린 ‘아슬라 심포지엄’의 기조 강연에서 해럴에 적용된 시스템을 소개하며 “사람들에게 삶의 일부를 되찾아줄 수 있는 중요한 기술”이라며 “브레인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는 이제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KIST가 2017년부터 열고 있는 아슬라 심포지엄은 해외 유명 학자를 초청해 도전적인 과학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다. 미국의 고든리서치콘퍼런스나 일본의 쇼난미팅을 벤치마킹해 심층적인 학술토론회로 자리 잡았다. 이름은 신라시대 강릉 지역의 이름인 ‘아슬라’를 땄다. 이번 심포지엄은 KIST 뇌과학연구본부가 ‘뉴로테크놀로지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했다.

UC데이비스 연구진은 신경 센서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루게릭병 환자인 케이시 해럴을 도왔다. 이들은 해럴의 대뇌 피질에 전극을 이식해 해럴이 말을 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신경 전기신호를 감지했고, 이를 이용해 해럴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UC Davis Health

이번 심포지엄은 뇌 신경과학 연구를 이끄는 정상급 해외 연구자들을 대거 초빙했다. 기조연사로 나선 존 나이 디렉터는 2014년 출범한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이끌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세포 지도를 작성하고, 여러 뇌 질환 극복을 위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한다.

브레인 이니셔티는 NIH를 중심으로 미국 연방 기관 다섯 곳과 여러 민간 재단에서 자금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16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존 나이 디렉터는 “인간의 복잡한 행동을 담당하는 뇌 신경 회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건강을 책임지고 질병에 적용하는 게 목표”라며 “지금까지 35억달러(약 4조8000억원) 이상을 투입했고, 8500편 이상의 논문이 나왔다”고 말했다.

브레인 이니셔티브는 출범한 지 10년을 넘어서면서 실제 인간 뇌 질환의 치료법을 찾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UC데이비스 연구진의 연구 성과도 NIH에서 자금을 지원 받았고, 브레인 이니셔티브에서 개발한 기술을 사용했다.

존 나이(John Ngai) 미국국립보건원(NIH) 브레인 이니셔티브 디렉터가 19일 KIST 강릉 분원에서 열린 아슬라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KIST

존 나이 디렉터는 “이제는 신경 회로의 연결성을 탐구하는 연구인 ‘브레인 커넥츠 프로젝트(Brain Connects Project)’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간의 뇌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정밀 유전자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뇌 질환은 그동안 질병의 말기 상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이제는 초기 단계에서 일어난 세포의 변화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신경 회로의 연결성을 이해하면 알츠하이머병 같은 뇌 질환의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해 병의 진행을 늦추거나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뇌 신경 과학자들도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영국신경과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타라 스파이어스 존스(Tara Spires-Jones) 에든버러대 교수와 미국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의 티모시 해리스(Timothy Harris) 선임연구원, 스탠퍼드대 마이클 린(Michael Lin) 교수 등이 나흘간 열리는 심포지엄을 위해 강릉을 찾았다.

마이클 린 교수는 누런(신경세포)이 활성화할 때 발생하는 활동 전압을 분석하는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 그는 “전압 지표를 이용해 뉴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면 뇌 신경 회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 뇌 기능 전체에 대한 모델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티모시 해리스 선임연구원은 살아 있는 생쥐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전기적 활성을 최대 규모로 볼 수 있는 ‘뉴로픽셀(Neuropixels)’의 개발 책임자다. 뉴로픽셀은 인간의 머리카락보다 얇은 실리콘 전극을 사용해 뉴런 수백 개 각각의 전기 신호를 감지하는 기술인데, 2017년 동물실험에서 시작해 2022년에는 인간에게도 적용됐다.

초파리 성체의 뇌 지도에 표시된 신경전달물질 분비 경로. 파란색은 가바(GABA), 주황색은 아세틸콜린, 자주색은 글루타메이트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과학기술계는 초파리 뇌 신경 지도를 이용해 인간의 뇌 질환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플라이와이어 컨소시엄, 미 프린스턴대

타라 스파이어스 존스 교수는 치매나 알츠하이머병 같은 뇌 질환과 관련된 시냅스(뉴런 연결부)의 활동과 역할을 탐구하는 신경과학자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의 발병과 관련해 뇌의 시냅스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소개했다. 존스 교수는 “알츠하이머병과 관련해 시냅스에 독성 단백질이 쌓여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냅스가 매우 작기 때문에 기존의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며 “신경공학 기술이 더 발전하면 뇌 신경 질환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데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KIST 외에도 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포스텍과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연구재단 등 국내 연구기관에서도 연구자들이 참석해 해외 연구자들과 교류했다. 심포지엄을 주최한 김진현 KIST 책임연구원은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뇌 신경공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강릉에 모인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며 “KIST도 이번 기회에 미국이나 영국 등 글로벌 공동 연구나 국제 협력을 함께 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 자료

NEJM(2024), DOI : https://www.nejm.org/doi/full/10.1056/NEJMoa2314132

Scienc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l0913

Science Translational Medicine(2023), DOI: https://doi.org/10.1126/scitranslmed.ade1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