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의 두 연구자가 탄소 원자들이 한 층으로 벌집 모양을 이룬 그래핀을 발견했다. 연필의 주성분인 흑연에 투명테이프를 붙였다가 떼는 방식으로 만든 그래핀은 투명하면서도 강철보다 강하고, 전기 전도도가 높아 ‘꿈의 신소재’라고 불렸다. 두 과학자는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래핀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필립 하버드대 교수의 노벨상 수상 불발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20년이 지난 지금, 김필립 교수의 제자가 스승의 아쉬움을 풀어주기 위해 그래핀 상용화에 나서고 있다.
홍병희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15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14년에 걸쳐 진행된 연구를 통해 그래핀이 상용화되기 직전”이라며 “한국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와 같은 제조 산업에 그래핀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상용화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김필립 교수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다.
2010년 그래핀 연구자들이 노벨상을 받은 직후, 전 세계 연구자들이 그래핀 상용화에 매달렸다. 하지만 쉽사리 성과가 나지 않자 일각에서는 그래핀이 과대 평가 됐다는 평도 나왔다. 홍 교수는 “기존에 있던 소재를 대체하려고 했던 게 상용화가 더뎌진 이유”라며 “기존에 쓰이던 소재들은 30~40년 전에 개발돼 가격 경쟁력이 높았는데, 당시 그래핀은 대량 생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쟁하려니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전략을 바꿨다. 다른 소재와 그래핀을 경쟁시킬 게 아니라, 그래핀만 할 수 있는 분야를 노려야 시장에 진출하기에 유리하다고 봤다. 그렇게 선택한 분야가 가전이었다. 홍 교수가 2012년 설립한 그래핀 스퀘어는 2023년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에서 ‘그래핀 라디에이터’로 최고혁신상을 받았다. 작년 미국 타임지의 올해의 최고 발명에도 선정됐다. 올해는 CES에서 ‘그래핀 멀티쿠커’로 혁신상을 받았다. 그래핀에서 나오는 중적외선 파장으로 음식물을 가열하면서도 기존의 코일 히터보다 전력 소비량을 최대 30% 가까이 낮출 수 있었다.
지금도 삼성전자와 LG전자, 아워홈 등 국내 기업들과 그래핀 상용화를 위한 연구를 이어 나가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삼성전자로부터 12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받았다. 홍 교수는 “삼성전자와는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에서 발생하는 열을 막는 방열 부품으로 그래핀을 활용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LG전자와는 진단센서, 아워홈과는 조리기구 분야에 그래핀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6월 포항에 대량 양산 공장을 착공했고, 내년 하반기에 준공되면 본격적인 양산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홍 교수는 앞으로 반도체, 배터리뿐 아니라 양자 센서나 양자 암호를 포함한 양자 기술에도 그래핀을 적용하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실리콘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뒤로 IT, 반도체부터 인공지능(AI)까지 실리콘 혁명이 일어났다”며 “이를 뛰어넘는 소재는 그래핀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20년 뒤에는 그래핀이 하나의 산업군을 이루고, 쓰이지 않는 곳이 없는 범용적인 소재가 되어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