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위원회는 지난 8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머신 러닝과 인공신경망 기술을 개발한 존 홉필드(John Hopfield·91)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7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선정했다./AFP 연합뉴스

2024년 노벨 과학상 수상자 발표가 끝나자 진정한 승자는 인공지능(AI)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가 모두 전통적인 물리학자나 화학자가 아니라 AI를 연구했거나 AI를 이용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과학 저널 ‘네이처’는 지난 10일 ‘AI가 노벨상 2관왕을 차지하며 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올해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전했다. 올해 노벨상의 파격적인 결정에 박수를 보내는 과학자도 많지만,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다. 노벨상의 변화가 과학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의견도 나왔다.

◇노벨 과학상, AI가 휩쓸자 과학계 충격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머신 러닝과 인공신경망 기술을 개발한 존 홉필드(John Hopfield·91)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7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가 받았다. 두 사람은 정통 물리학자가 아니고, 심지어 힌튼 교수는 컴퓨터 과학자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수상자를 선정한 노벨 위원회는 두 사람이 만든 딥 러닝과 인공신경망 기술이 물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고 수상자로 선정했다. 노벨 위원회는 별도로 배포한 자료에서 두 사람의 성과가 통계 물리학에서 발전한 볼츠만 방정식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까지 했음에도 과학계에서는 올해 노벨상 선정에 대해 물음표가 여전하다. 독일의 물리학자인 사빈 호센펠더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홉필드와 힌튼의 연구는 컴퓨터 과학 분야에 속한다”며 “노벨상은 물리학자가 주목 받을 수 있는 드문 기회지만, 올해는 그렇지 못 했다”고 밝혔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UCL)의 천체물리학자 조나단 프리차드 교수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노벨상이 AI에 대한 과대광고로 상처를 입었다”며 “기계 학습이나 인공신경망을 좋아하지만 이것이 물리학적 발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이런 목소리는 AI 업계에서도 나온다. AI 스타트업인 페블러스의 이정원 부대표는 “물리학상을 AI가 받은 건 의외”라며 “이론을 세우고 증명하는 식의 과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베이커 워싱턴대 교수가 축하를 건네는 학생들 앞을 지나가고 있다./AP 연합뉴스

노벨 화학상도 마찬가지 반응을 불렀다. 올해 노벨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 예측 AI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 연구진과 세상에 없던 새로운 단백질을 만드는 AI를 개발한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62) 워싱턴대 교수가 받았다. 이들 덕분에 기존에는 1년 이상 걸리던 단백질 구조 분석과 예측을 단 몇 분이면 할 수 있다. 노벨 위원회는 이들의 연구가 인류 이익을 위해 엄청난 성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과학자들은 노벨 위원회의 설명에 여전히 동의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AI가 노벨상을 받은 건 너무 뜻밖의 결과”라며 “과학이라는 건 가설을 만들고 그 과정을 상세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의 AI 기술은 블랙박스처럼 결과가 나오는 과정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굉장히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과학의 경계 흐려진 추세 반영

한편에선 이런 변화를 연구 현장에 연결시켜 인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과학자들은 올해 노벨 과학상 결과를 두고 전통적인 과학의 영역 구분이 무의미해지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AI 연구가 주목받은 것은 물리학상과 화학상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유전자를 조절하는 마이크로RNA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마이크로RNA를 이용한 치료제가 여러 난치병 치료에 쓰이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RNA에 대한 연구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2006년에는 로저 콘버그 스탠퍼드대학교 교수가 RNA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2020년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역시 RNA와 깊은 관련이 있다. 거의 비슷한 연구 분야지만 누구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고, 누구는 노벨 화학상을 받는데 정확한 차이를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이덕환 명예교수는 “노벨상에서 화학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2000년대 이후 노벨 화학상 수상자를 보면 한동안 현미경과 단백질 관련 연구자에게 주다가 생명과학 쪽으로 많이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화학 분야에 상이 주어진 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매년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리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 설명회는 이런 변화를 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노벨상 발표에 맞춰서 각 분야별 전문가를 미리 불러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수상자들의 업적을 소개하는 설명회를 연다. 주로 전통적인 물리학자, 화학자가 참석하는데, 올해는 현장에 참석한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기자들은 AI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연구자나 생명과학 교수에게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구글 딥마인드 연구진. 왼쪽이 데미스 허사비스 CEO, 오른쪽이 존 점퍼 수석연구원./REUTERS 연합뉴스

◇AI를 중심으로 융합, 협업 증가할 듯

네이처는 이런 현상을 두고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이라는 고전적인 자연과학의 삼두정치에 느슨하게 배정돼 있던 노벨상에 변화가 생겼다고 표현했다. 그 변화의 시발점이 AI 기술이라는 것이다.

연구 현장에서는 AI가 불러일으킨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반응이 많다.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는 “제1의 원리를 찾아내는 물리학도 있지만, 그걸 기반으로 해서 응용하는 것도 물리학이고, 이런 분야에서는 AI나 머신 러닝을 활용한 연구가 많아지고 있다”며 “올해 노벨 물리학상이 의외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물리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발견을 한 자에게 수여하라는 취지만 놓고 보면 특별한 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대한화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필호 강원대 화학과 교수도 “과학이라는 건 트렌드가 계속 바뀌는데 지금은 AI가 모든 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며 “화학자들이 AI 분야와의 협력을 통해 좋은 업적을 낼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노벨 과학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변화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의 영역과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여러 분야의 연구자가 공동 연구를 하거나 협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학제 간, 국가 간 협업과 공동 연구가 일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노벨상도 이런 변화에 발 맞추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다만 이런 변화를 인정하려면 보다 엄밀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반론도 있다. 변화의 중심인 AI 자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덕환 교수는 “원인과 결과를 상세하게 이해하는 게 과학인데, 지금의 AI는 과정은 없고 결과만 보여주는 것”이라며 “AI를 연구에 활용하는 건 의미가 있지만, AI 내부의 작동 원리를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AI의 정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