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화학상은 생명 현상을 유지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예측하고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하는 데 인공지능(AI)을 도입한 세 명의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 위원회는 9일(현지 시각)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신약 후보 물질 발굴의 강력한 게임체인저로 떠오른 단백질 3차원 구조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한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62) 워싱턴대 교수와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48)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존 점퍼(John Jumper·39) 딥마인드 수석연구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단백질은 생체 분자 중에서도 특별한 기능을 하는 물질이다. 음식을 소화하는 효소, 외부에서 들어 온 병원체와 싸우는 항체도 모두 단백질이다. 노벨 위원회가 “뼈와 피부, 근육 등 생명 현상을 이해하려면 단백질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을 정도다.
단백질이 과거에는 생명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최근에는 신약 개발에 빠르게 적용되고 있다. 단백질 의약품이라고 불리는 인슐린, 성장호르몬, 항체는 그간 치료가 불가능하던 질환을 정복하는데 활용된다. 암 환자를 위한 면역 항암제는 대표적인 단백질 의약품이다. 면역 항암제는 3세대 항암제로 분류되며 부작용이 적고 효과는 우수해 암 환자의 생존률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의약·바이오 산업에서도 굵직한 이정표를 남겼다. 허사비스 CEO는 알파폴드를 이용한 신약 개발 스타트업 ‘아이소모픽랩스’를 창업해 일라이릴리와 함께 신약 개발에 나섰다. 계약 규모는 17억4500만달러(약 2조3452억원)에 달한다. AI는 단백질 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전통 제약사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도 AI를 이용해 단백질 신약 개발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석차옥 서울대 화학과 교수는 신약 개발 기업 갤럭스를 창업했다. 석 교수는 베이커 교수와 마찬가지로 계산 화학을 이용한 단백질 구조 설계 분야의 전문가다.
갤럭스는 AI 모델 ‘갤럭스 바이오 디자인(GBD)’을 개발하고 있다. AI를 이용해 자체 신약 개발을 이뤄낸다는 목표다. 기존 제약사가 이미 존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개선해 성능을 높이는 방식을 시도한다면, 갤럭스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어 의약품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이 방법은 단백질 의약품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했던 불치병의 정복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박태용 갤럭스 부사장은 “가령 면역 항암제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절대 치료할 수 없는 암도 있다”며 “새로운 단백질 설계가 가능하다면 그간 치료법이 없던 암도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김우연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AI 신약 개발 스타트업 히츠(HITS)를 이끌고 있다. 자체 신약 개발보다는 제약사들의 연구를 돕는 플랫폼(기반 기술)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김 교수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이 단백질이라는 물질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면, 현재 산업계에서는 단백질과 단백질, 단백질과 디옥시리보핵산(DNA) 같은 여러 물질의 상호 작용에 관심이 있다”며 “이게 가능해진다면 단백질 의약품뿐 아니라 화합물이 우리 몸의 어떤 단백질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돼 전통 제약사에도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히츠의 AI 모델은 ‘하이퍼랩’으로 고객들이 가상 실험실에서 자유롭게 실험을 할 수 있게 돕는다. 김 교수는 “해외에서도 오킨, 이토스, 머크 같은 기업이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히츠는 향후 메신저 리보핵산(mRNA) 같은 다양한 물질로도 활용 범위를 넓혀 나간다는 계획이다.
전통 제약사인 유한양행(000100)과 한미약품(128940), 대웅제약(069620)도 AI기술을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들은 자체 모델 개발보다는 AI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이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대웅제약은 일찌감치 AI 기술에 관심을 보인 회사다. 대웅제약은 2020년부터 해외 AI 기업들과 협력해 신약 개발에 나서고 있다. A2A파마, 온코크로스, 머크라이프사이언스가 주요 협력 파트너다. 유한양행과 한미약품은 AI 플랫폼 기업 아이젠사이언스와 협력해 항암제 신약 후보 물질을 찾고 있다.
김 교수는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약 개발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며 “의약품은 어떤 단백질과 결합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강하게 결합하느냐가 더 중요한데 지금의 AI 모델은 아직 이 부분에는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양한 기업들이 이번 노벨 화학상 수상자의 업적 이후에 남은 기술적 한계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