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머신 러닝(기계학습) 기술을 개발해 인공지능(AI) 시대의 주춧돌을 놓은 두 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주인공은 존 홉필드(John Hopfield·91)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7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다.

두 사람의 수상 소식에 과학계는 물론이고, AI 업계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다. AI 스타트업인 페블러스의 이정원 부대표는 “딥러닝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건 상당히 의외”라며 “딥러닝 이론은 실제로 써보니까 잘 작동해서 쓰는 거지 실제로 이게 어디까지 유효하고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정밀한 증명은 없다”고 말했다. 이 부대표는 “노벨상은 이론이 나오고 실험으로 증명이 돼야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증명의 영역이 아닌 가상 세계에 대한 이론이 상을 받아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 위원회는 8일(현지 시각)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존 홉필드(John Hopfield·91)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77)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노벨물리학상 심사위원회 의장인 이론물리학자 앤더스 이르백 교수가 두 사람의 연구 성과와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실제로 두 사람은 정통 물리학파는 아니다. 힌튼 교수는 컴퓨터 과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이고, 홉필드 교수는 물리학과 생물학을 넘나들며 연구자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이라는 물리학자 최고의 영예를 차지한 건 그들의 연구 성과에 물리학에 대한 기초가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홉필드 교수는 딥 러닝의 기본 원리인 신경망의 개념을 정리했다. 홉필드 교수가 1982년에 모든 뉴런(신경세포)이 양방향으로 연결된 신경회로망 모형인 ‘홉필드 네트워크’의 개념을 제안했는데, 여기에 물리학 원리가 있다.

홉필드 교수는 원자를 작은 자석으로 만드는 특성인 스핀(각운동량)이 이웃한 원자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에 착안해 홉필드 네트워크를 떠올렸다. 스핀이 서로 영향을 미칠 때 물질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설명하는 물리학을 가져와서 인공신경망의 노드도 뉴런처럼 서로 연결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홉필드 교수가 떠올린 건 물리학의 대표적인 모형인 ‘이징 모형’이다. 이징 모형은 통계 물리학에서 상전이외부 조건에 따라 다른 상으로 바뀌는 현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형으로 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장은 “홉필드 네트워크는 물리학의 이징 모형에서 쓰는 아이디어를 차용해 신경망이 추론을 통해 하나의 결과로 수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며 “이징 모형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이걸 기존의 신경망 모델에 적용했다는 게 홉필드 교수의 뛰어난 업적”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과 인공신경망 원리./조선DB

물리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힌튼 교수 역시 물리학을 이용한 연구 성과를 냈다. 홉필드 교수의 네트워크가 연상 기억에 최적화됐다면 힌튼 교수는 이를 발전시켜서 딥 러닝이라는 학습 모델을 완성했다. 홉필드 교수가 이미지를 기억하는 방식을 연구했다면, 힌튼 교수는 이미지가 묘사하는 내용을 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홉필드 교수가 자신만의 인공신경망 모델을 만든 1982년, 힌튼 교수는 미국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론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기계가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패턴을 처리하는 방법을 학습해서 정보를 분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 때 힌튼 교수와 함께 연구를 한 동료가 홉필드 교수의 제자였던 테렌스 세즈노스키다.

두 사람은 통계물리학을 활용해 홉필드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통계 물리학은 기체의 분자와 같이 유사한 여러 요소로 구성된 시스템을 설명할 수 있다. 기체 내의 모든 분자를 개별적으로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압력이나 온도 같은 특성을 파악하는 건 가능하다. 개별 구성 요소가 공동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태를 분석하는 방법이 통계 물리학인데, 두 사람은 19세기 통계 물리학자인 루드비히 볼츠만의 방정식을 이용했다.

볼츠만 방정식은 가용 에너지의 양에 따라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보다 가능성이 높은지 보여준다. 두 사람은 볼츠만 방정식을 홉필드 네트워크에 접목해서 ‘볼츠만 머신’을 만들었다. 볼츠만 머신은 주어진 데이터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확률적으로 계산해 결과를 출력하는데, 지금의 생성형 AI의 전신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볼츠만 머신에 특정 데이터를 학습시키면 새로운 데이터에서도 익숙한 패턴을 찾아낸다.

힌튼 교수는 볼츠만 머신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고 마침내 2006년에 볼츠만 머신을 겹겹이 쌓아서 네트워크를 미리 훈련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지금의 딥 러닝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노벨 위원회는 물리학상에 대한 설명 자료에서 “1980년대부터의 연구 덕분에 홉필드와 힌튼은 2010년대에 시작된 머신 러닝 혁명의 토대를 마련했다”며 “물리학이 머신러닝의 발전에 기여한 도구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물리학이 머신 러닝과 인공신경망의 혜택을 받는 것 역시 흥미로운 일”이라며 “머신 러닝은 이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인 힉스 입자나 블랙홀 충돌에서 발생하는 중력파 측정 등에 활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