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모든 뇌 세포를 담은 완전한 뇌 지도 ‘커넥톰(connectome)’이 완성됐다. 커넥톰은 ‘전체(ome) 신경세포들의 연결(connect)’을 뜻하는 말로 일종의 뇌지도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국제 학술지에 초파리 유충의 뇌 지도가 공개된 데 이어 다 자란 성체 초파리의 세포 지도를 완전하게 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성체 동물의 완전한 뇌 지도가 공개된 것은 1982년 예쁜꼬마선충 이후 32년 만이다.
초파리 뇌 연구를 위해 결성한 ‘플라이와이어(FlyWire) 컨소시엄’은 3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약 14만개에 달하는 뇌 세포와 5000만개 이상의 시냅스 정보를 담은 초파리의 뇌 지도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모두 9개 논문으로 나눠 특별호로 발표됐다.
◇노벨상 수상자 10명이 초파리 연구
이번 연구에 참여한 배준환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후연구원은 “초파리는 전체 유전자 분석이 끝난 몇 안되는 실험 동물”이라며 “유전자 대부분도 인간과 공유하고 있어 초파리 뇌 지도를 활용해 인간의 뇌 질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초파리는 여름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장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음식물에 포함된 당과 산성 물질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일 속 산성 성분을 특히 좋아해 영어권 국가에서는 과일파리(fruit fly)라고도 부른다.
초파리는 몸 길이가 수㎜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곤충이지만, 생물학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번식이 쉬우면서도 유전적으로 인간과 비슷해 연구에 적합한 덕이다.
실제로 초파리의 유전자 중 70%는 사람과 같으며, 인간 유전 질환의 4분의 3은 초파리에서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초파리는 사람처럼 나이를 먹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짝을 찾기 위해 소리도 낸다. 고등 동물에서 나타나는 구애 활동이나 일주기 리듬도 갖고 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10명은 초파리 연구를 통해 이뤄낸 성과를 인정 받았다.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은 1947년 초파리를 우주로 보낸 뒤 살아 있는 상태로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인간이 우주에 진출하기 전에 선발대 역할을 수행한 동물이 초파리다.
◇뇌 전자현미경 사진 14만장 분석
플라이와이어 컨소시엄 연구진은 초파리 뇌를 촬영한 전자현미경 사진 14만장을 분석해 완전한 뇌 지도를 만들었다. 전자현미경은 해상도가 수㎚(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로 세밀한 영상 촬영이 가능한 기술이다. 초파리의 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수백㎛(마이크로미터·1㎛는 100만 분의 1m)에 달해 전자현미경 영상으로 모두 분석하려면 오랜 시간이 든다. 한 사람이 데이터를 분류할 경우 33년이나 걸리는 작업이다.
연구진은 인공지능(AI)을 도입해 자동으로 세포와 세포 사이의 연결 지점인 시냅스를 자동으로 표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뇌 구조가 워낙 복잡해 발생하는 오차는 다른 연구자들이 참여해 함께 보정하는 방식으로 지도를 만들었다.
플라이와이어 컨소시엄은 2018년 초파리의 뇌 영상 데이터를 모든 과학자들에게 공유하고 자신들의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영상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공유하도록 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접속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 환경도 구현했다. 덕분에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6년 만에 완전한 초파리 뇌 신경 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이번에 공개된 뇌 지도를 이용해 새로운 세포 유형을 찾아내기도 했다. 초파리의 뇌는 8400종 이상의 세포로 이뤄져 있으며, 그중 절반이 넘는 4581종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유형이다. 성체 초파리의 뇌에서는 13만9255개에 달하는 신경 세포와 5450만개의 시냅스가 있었다. 작년에 발표된 초파리 유충의 뇌 지도에는 3016개의 신경 세포와 54만8000여개의 시냅스가 있었다.
◇인간 뇌 질환 정복에 새로운 길 열어
과학기술계는 이번에 공개된 초파리 뇌 신경 지도를 통해 인간을 괴롭히는 뇌 질환을 정복할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신경과학 분야 최고의 석학이자 이번 연구를 주도한 세바스찬 승(승현준)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한 종류의 뇌만 완벽히 이해하더라도 모든 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며 “이번 초파리 뇌 지도는 인간 뇌에 대해 전례 없는 수준의 이해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번 초파리 뇌지도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바스찬 승 교수는 이날 발표된 논문 9편 중 시각 시스템에 대한 논문의 교신 저자이다. 그는 뇌지도 작성에 게임을 적용한 것으로 유명한 과학자다. 앞서 생쥐 망막의 신경세포 연결망을 찾는 게임인 ‘아이와이어(EyeWire)’를 개발했다. 2014년에는 KT와 함께 게임 한국어 버전도 만들었다.
산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의 김성수 교수는 고등 시각 인지에 필요한 신경세포들의 연결 구조를 규명한 논문의 교신 저자였다.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김진섭 교수는 초파리 뇌에서 다양한 행동이 유발되는 과정을 컴퓨터로 재현한 연구 논문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커넥톰 스타트업인 제타 에이아이(Zetta AI)의 이기석 박사와 서울대 배준환 박사는 커넥톰 제작을 위한 소프트웨어와 AI 기술 개발에 기여했다. 배 박사는 “지금까지 뇌 연구는 한 종류의 세포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실제 뇌는 여러 종류의 세포가 상호작용해 작동한다”며 “모든 세포와 그 연결을 보여주는 뇌 지도는 질환 연구에 필수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과학기술계는 초파리를 넘어 생쥐, 사람의 뇌 지도도 만들 수 있는 날이 다가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생쥐의 뇌 지도는 이르면 10년 내에 완성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배 박사는 “앞으로 10년쯤 뒤 생쥐의 뇌 지도 작성을 목표로 연구 중”이라며 “생쥐의 뇌는 초파리보다 1000배 크기 때문에 다소 시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전체 뇌 지도는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부위별로 재구성한 데이터는 이미 확보해둔 상태”라며 “동물 뇌 지도에서 중요한 연구들이 이뤄진다면 사람 뇌에 대한 지도 작성도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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