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25일 오후 6시 24분,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는 차세대소형위성 2호를 무사히 궤도에 올렸다.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우주 발사체의 첫 실전 발사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누리호 개발을 이끌었던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당시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누리호는 우리 위성을 우리가 원할 때 발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누리호가 성공하자 고 본부장은 차기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지난 8월 항우연 원장 선임을 위한 공모가 시작되자 고 본부장도 지원했다. 하지만 결과는 조기 탈락이었다. 항우연 원장추천심사위원회는 6배수로 후보를 한 차례 추렸는데, 여기에 고 본부장이 들어가지 못했다. 한 우주 스타트업의 대표는 “누리호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본부장의 상징성이 있는 만큼 최종 후보 3인에는 들 줄 알았는데, 조기에 탈락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전했다.

항우연에서 우주발사체 개발을 주도한 연구자들이 잇따라 기관, 기업에서 고배를 마셨다. 한국 우주개발이 민간 주도의 뉴스페이스(new space)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서 발사체 개발을 주도했던 연구자들이 정부와 기업의 관심에서 밀려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항우연 연구자들은 향후 우주발사체 개발 일정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작년 5월 13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당시 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이 누리호 모형을 들고 인증모델(QM) 앞에 서 있다. QM 발사체는 지상 엔진시험용으로 만든 것이다./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항우연 원장추천심사위원회는 조만간 최종 후보 3명을 대상으로 면접을 한 뒤 최종 후보자를 결정할 예정이다. MB 정부 시절 우주 분야 연구개발(R&D)과 정책을 주도한 A교수가 유력한 후보로 전해진다. 이번 정부 들어 과학기술계에서는 MB 정부 시절 인사들이 중용되고 있다. 항우연 신임 원장 인사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고 본부장의 항우연 원장 공모 조기 탈락은 누리호 개발의 주역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 개발을 이끌었던 조광래 전 항우연 원장과 항우연 발사체연구소 소속 연구원 10명은 지난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누리호 고도화사업과 차세대 발사체 개발 사업의 체계종합기업을 맡으면서 우주 발사체 개발을 이끌고 있다. 전문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항우연의 노련한 연구원들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갑자기 터진 기술유출 의혹에 길이 막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이직하려던 항우연 연구원 중 일부가 누리호 기술을 유출했다며 징계를 요구하고, 검찰에 수사도 의뢰했다. 하지만 과기정통부의 감사 자체가 무리하게 진행됐다는 비판이 일었고, 실제로 검찰도 증거불충분으로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다. 항우연 자체 징계위원회도 마찬가지 결론을 냈다.

1년 가까이 검찰 수사와 과기정통부 감사가 이어지면서 조 전 원장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직은 무산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당초 조 전 원장을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영입하려 했지만 영입을 포기했다. 기술유출 의혹에 시달렸던 4명의 항우연 연구원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직이 무산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먼저 자리를 옮겼던 항우연 연구원들도 사실상 업무에서 배제돼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누리호에 사용되는 75톤(t)급 엔진. 이 엔진에는 75만개에 달하는 부품이 들어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스마트팩토리에서 부품을 생산해 발사 비용을 절감한다는 구상을 공개했다./한화에어로스페이스

과학기술계는 작년 5월 누리호 3차 발사 이후 이렇다 할 대형 이벤트가 없자 우주 분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식었다고 본다. 정부가 뉴스페이스를 내세우면서 누리호처럼 관이 주도한 우주 발사체와 이를 개발한 연구자들의 입지나 위치가 애매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우주 R&D에 참여하는 한 대학 교수는 “뉴스페이스를 강조하다 보니 누리호는 더 이상 정부가 홍보를 위해 활용할 가치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며 “항우연 발사체 연구자들이 워낙 자기 목소리가 크다 보니 정부 입장에서 껄끄러워 한 측면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뉴스페이스도 기대와 달리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차세대발사체 개발 사업을 이끄는 항우연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지적재산권을 놓고 싸우면서 제때 개발이 진행되기 힘들다는 우려도 나온다. 항우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내년 말 누리호 4차 발사도 성공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뉴스페이스의 주역으로 주목 받았던 이노스페이스(462350)는 주식 시장 상장 두 달 만에 주가가 반 토막났다. 우주 발사체 스타트업인 페리지에어로스페이스는 몇 달 째 시험 발사 일정을 미루고 있다. 우주항공청이 지난 5월 출범했지만, 정원을 채우려면 올해 말은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누리호 개발에 참여한 한 연구자는 “스페이스X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수십 년에 걸쳐 미 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뉴스페이스도 올드스페이스가 기반이 돼야 가능한데, 누리호 개발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한국만의 우주 개발을 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누리호 연구자에 대한 차별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항우연 원장 선임은 항우연 이사회가 구성한 원장추천심사위원회가 정부와 무관하게 진행하고 있고, 항우연 기술 유출 의혹에 대한 감사도 보복·표적 감사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항우연 원장 선임 과정이나 누리호 기술 유출 의혹을 둘러싼 감사와 이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직 문제는 정부가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