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신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는 염색 샴푸의 아버지로 불린다. 사과 껍질을 깎고 공기 중에 두면 과육이 갈색으로 변한다. 이 교수는 이런 사과의 갈변 원리를 이용해 감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갈색이 되는 염색 샴푸를 개발했다. 사과에 있는 폴리페놀 성분이 산소와 만나면 갈색으로 변한다. 그는 샴푸에 폴리페놀을 넣어 머리카락 표면에서 갈변을 유도했다. 염색제를 넣지 않고도 염색이 되는 샴푸였다.
염색 샴푸는 민간 기업에 기술 이전됐고, 수백억원의 매출을 내는 인기 상품이 됐다. 하지만 이 교수는 염색 샴푸 기술을 이전 받은 기업과 갈등을 겪었고, 지금은 갈라선 상태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단백질에 잘 붙는 폴리페놀의 특성을 살리면 다양한 헤어 제품에 적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속 제품은 바로 탈모를 막아주는 샴푸였다.
지난 4일 대전 KAIST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처음부터 탈모 샴푸를 겨냥한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의 도움으로 작년 8월 폴리페놀팩토리라는 스타트업을 교원 창업하고, 올해 4월 ‘그래비티(Grabity)’라는 이름의 샴푸 제품을 출시했다. 사실 그래비티는 처음에는 모발을 두껍게 해주고 볼륨감을 높여주는 샴푸를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그래비티 샴푸를 사용하면 머리카락에 힘이 생기고 굵어지는 효과가 있어서 처음에는 볼륨 샴푸로 출시했다”며 “염색 샴푸를 만들 때부터 폴리페놀을 이용하면 이런 헤어 제품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시장 반응은 의외였다. 그래비티 제품이 출시되자 사용자들은 후기에서 볼륨 샴푸가 아니라 탈모 샴푸라는 별명을 붙였다. 폴리페놀팩토리의 윤현주 이사는 “사용자들이 제품평을 하는 과정에서 유독 탈모를 제어하는 효과가 크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곧바로 탈모 방지 효과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했는데, 샴푸를 사용한 지 2주 만에 탈모가 약 70% 감소한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탈모 샴푸의 임상시험은 보통 6주 동안 샴푸를 사용하면서 실제 빠지는 모발 수가 얼마나 줄었는지 확인한다. 6주 이후 빠진 모발 수가 70% 감소하면 효과가 있다고 보는데, 그래비티는 6주가 아니라 2주만 써도 충분한 효과가 나타났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의 특성을 살린 특허성분 ‘리프트맥스 308′이 머리를 감는 과정에서 모근에 달라붙어 코팅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이 성분이 외부 자극으로부터 모발을 보호하고, 모발의 구조 물질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식으로 탈모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고시한 탈모 기능성 원료가 세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탈모 샴푸는 기능성 원료가 있어도 물로 씻는 과정에서 모근이나 모발에 제대로 붙어있기 힘들다”며 “그래비티는 폴리페놀 특허성분이 탈모를 막아주는 원료 물질을 모근에 흡수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 빠르고 좋은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07년부터 폴리페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는 바닷가 바위에 붙어 있는 홍합의 접착력이 폴리페놀이 덕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표지 논문으로 발표했다. 지금까지 다른 학자의 논문에 인용된 횟수만 1만회가 넘는 세계적인 논문이다.
폴리페놀은 사과처럼 식물에도 많은 분자인데, 단백질과 잘 결합하고 세포를 손상하는 활성산소를 잡아주는 항산화 기능도 있다. 이 교수는 머리카락도 결국 단백질이기 때문에 폴리페놀의 특성을 여러 헤어 제품에 이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 폴리페놀의 특성을 살려 염색 샴푸를 만든 데 이어 볼륨감을 높이는 샴푸 개발에 뛰어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탈모 방지 샴푸로 성공한 것이다.
이 교수는 앞으로는 여성형 탈모증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인과 치료법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남성형 탈모증과 달리 여성형 탈모증은 원인도 명확하지 않고, 치료법도 쉽지 않다. 남성형 탈모증은 비교적 풍성한 뒷머리에서 모발을 채취해서 모발이 빈 앞머리에 이식해 대응하지만, 여성형 탈모증은 머리 전체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얇아져 이런 모발 이식이 쉽지 않다.
이 교수는 “여성 탈모는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우리는 병원과 협업을 통해 여성형 탈모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며 “여성형 탈모증에 효과가 있는 약물과 거기에 맞춘 샴푸를 동시에 활용해서 시너지를 내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페놀팩토리는 최근 2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스타트업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효성화학이 투자자로 나섰다. 이 교수는 투자 유치 과정에서 조현준 효성 회장을 직접 만났다고 했다. 그는 “조 회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B2B(기업 간 거래) 중심인 효성이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사업에 목 말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효성화학의 투자금을 이용해 생산 설비 자동화와 마케팅 확충 등에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본격적으로 탈모 샴푸 마케팅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8월 마지막 주말에만 2300건의 주문이 들어왔다”며 “입소문만으로도 탈모 샴푸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부터 이마트나 롯데홈쇼핑 등 여러 유통 채널에 판매를 시작하면 판매량도 덩달아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폴리페놀 헤어 제품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곱슬머리를 매끈한 직모로 만들어주는 스트레이트 샴푸, 손에 묻지 않는 천연 스프레이, 아이래시(속눈썹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화장품)나 인조손톱을 붙이는 네일용 접착제 등이 대표적이다.
과학자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이 교수의 다음 목표는 뭘까. 이 교수는 “세상에 없는 재미있고 특이한 제품이면서도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폴리페놀팩토리가 신제품을 내면 국내외에서 모두 일단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