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가장 흔한 나무는 뭘까.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를 먼저 떠올리지만, 21세기 들어 판도가 바뀌었다. 재선충병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소나무가 줄어들고 활엽수의 일종인 참나무류가 늘고 있다. 임업통계연보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소나무의 분포 비율은 22.3%, 참나무류는 25.5%로 참나무류가 이미 소나무를 앞섰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100년쯤에는 한반도 전역이 참나무 위주 활엽수림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참나무가 늘어나면서 산림 자원의 활용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국립산림과학원과 한국식품연구원 등 여러 기관이 힘을 합쳐 한반도의 우점종이 되고 있는 참나무를 이용해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2018년 한국식품연구원 전통식품연구단이 주도한 ‘전통 증류주 현대화’ 프로젝트였다.

충북 충주의 우리 술 양조장인 다농바이오는 오크통에 증류주를 숙성한 '낫포세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다농바이오가 처음 포르투갈에서 오크통을 가져온 날 찍은 사진./다농바이오

◇참나무 오크통 만들 한국 나무는 신갈나무

한국식품연구원은 우리 전통주를 숙성할 수 있는 소재 개발에 착수했다. 흔히 ‘오크통’이라고 부르는 참나무 숙성 용기 개발에 나선 것이다. 연구에 활용된 한반도 자생 참나무는 갈참나무·굴참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였다. 여섯 종류의 참나무 중에 어떤 나무가 가장 증류주 숙성에 적합한 지 확인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됐다.

나무의 표면을 태우는 탄화 실험과 숙성통을 만들기 위한 제형 가공에 적합한 지, 증류주를 숙성했을 때 어떤 성분 변화가 일어나는지 등을 살폈다. 나무를 이용해 숙성통을 만들 때는 나무에서 물이 이동하는 도관을 막는 세포인 타일로시스 함량도 중요하다. 타일로시스가 부족하면 목통에 넣은 술이 밖으로 스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종류별로 타일로시스 함량을 확인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국내에도 오크통을 만드는 업체가 있지만, 어떤 수종이 오크통에 어울리는지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연구를 이끈 김태완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국내에서 증류주 숙성에도 쓸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해외 위스키 제조업체가 한국산 오크통을 이용할 수도 있다”며 “한국산 참나무 오크통도 미국이나 유럽의 오크통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연구 끝에 최종 후보로 선정된 건 신갈나무였다. 오크통에서 증류주를 숙성하면 나무로부터 유래한 특유의 검붉은 색과 함께 오크락톤(Oak lactone)이라고 부르는 풍미가 생긴다.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색과 풍미도 진해진다. 오크락톤 중에서도 증류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성분이 시스오크락톤(cis-Oak lactone)과 트란스오크락톤(trans-Oak lactone)이다. 우리가 오크통에 숙성한 술을 마실 때 나무 향이 난다거나 바닐라나 코코넛 오일 같은 향이 난다고 하는 이유가 이 오크락톤에서 나오는 풍미 때문이다. 참나무 6종으로 만든 오크통에서 증류주를 숙성한 결과 신갈나무 오크통에서 이 오크락톤이 가장 풍부하게 검출됐다.

그래픽=손민균

신갈나무 오크통의 시스오크락톤 함량은 1L당 0.50㎎, 트란스오크락톤은 0.48㎎이었다. 스카치위스키를 오크통에서 3년 정도 숙성하면 시스오크락톤이 1L당 0.26㎎, 트란스오크락톤이 0.70㎎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신갈나무 오크통이 기존 오크통 연구 결과와 가장 비슷한 결과물을 보여줬다. 김 책임연구원은 “신갈나무는 6개 수종 중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추후 오크통 산업화까지 염두에 뒀을 때 상업화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봤다”고 말했다.

오크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름이 큰 대경재가 필요하다. 대경재는 지름이 0.4m 이상의 나무를 말한다. 대경재를 기준으로 하면 신갈나무의 오크통 생산 가능 수량이 200L 기준 1350만개로 굴참나무(832만4000개), 상수리나무(308만4000개) 등 다른 5개 수종을 합한 것보다 많다. 신갈나무 오크통을 택한 건 언젠가 한국산 오크통이 상업화됐을 때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국산 오크통 보내 숙성 실험

연구진은 한 걸음 더 나가 실제 한국산 오크통을 이용해 위스키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에서 스카치위스키를 숙성하는 데 도전했다. 아메리칸 오크통과 경남 합천에서 가져온 신갈나무로 만든 한국산 오크통을 각각 10개씩 스코틀랜드의 양조장에 보내서 현지 스카치위스키를 숙성하는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오크통을 10개씩 보낸 건 1개월부터 24개월까지 숙성 기간을 10가지로 나눠서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진은 2020년 영국의 세인트 조지 증류소에 오크통을 보냈고 2022년까지 2년 동안 숙성실험을 진행했다. 스카치위스키는 보통 3년 이상 숙성하지만, 연구진은 연구 목적으로 2년만 숙성을 했다. 대신 숙성을 진행한 오크통의 크기가 20L로 작아 숙성이 3배 정도 빨리 진행돼 실제로는 6년 정도 숙성한 효과가 있다고 김 책임연구원은 설명했다.

한국산 참나무 오크통에 숙성한 스카치위스키의 맛은 어떨까. 지난 14일 뙤약볕을 뚫고 방문한 전북 완주군 한국식품연구원에는 스카치위스키가 담긴 500mL 유리병 160개가 연구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난한 통관 과정을 거친 끝에 지난 7월에야 연구원에 도착한 스카치위스키이다. 눈으로는 어떤 게 한국산 오크통에서 숙성했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식품연구원은 한국산 참나무 오크통을 만들어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스카치위스키를 숙성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사진 속 위스키가 2년에 걸쳐 숙성 실험을 진행한 결과물. 맨 왼쪽이 숙성 기간이 가장 짧은 1개월, 맨 오른쪽은 숙성 기간이 가장 긴 24개월짜리 스카치위스키다./완주=이종현 기자

맛도 마찬가지였다. 숙성을 오래 진행한 스카치위스키는 특유의 과일향과 밀크초콜릿 같은 맛이 감돌았다. 한국식품연구원에서는 160병의 샘플을 활용해 보다 자세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추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말에는 최종 연구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처음 연구가 시작된 지 6년 만이다.

식품연구원이 이렇게 오랜 기간 한국산 오크통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인 이유는 우리 술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 숙성 증류주의 단위 가치는 ㎏당 8.02달러다. 반면 비숙성 증류주는 ㎏당 1.49달러. 숙성 여부에 따라 가치가 5.4배나 차이가 난다.

◇오크통 숙성 증류주 나오자 마자 완판

충북 충주의 농업기업인 다농바이오는 오크통을 이용한 증류주 숙성을 고민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다농바이오는 충주산 쌀과 물, 발효제로 증류주를 만들고 있다. 2023년 첫 제품인 가무치25를 출시했고 이어서 가무치43도 내놨다. 가무치25와 43은 옹기를 이용해 숙성했다. 가무치43은 유명 국제주류품평회 IWSC(International Wine & Spirit Competition)에서 98점으로 골드메달을 받을 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5일 직접 찾은 다농바이오 양조장의 창고에는 400여개에 달하는 오크통이 쌓여 있었다. 다농바이오가 직접 포르투갈의 쿠퍼리지(Cooperage·오크통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들여왔다. 포트와인과 레드와인, 토카이 와인을 담았던 오크통에 다농바이오가 만든 증류주를 넣어 숙성하고 있었다. 최근 오크통에 숙성한 증류주인 낫포세일을 내놓았다. 장보아 다농바이오 팀장은 “지금은 오크통에 숙성한 낫포세일이 주력 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오크통 숙성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다”며 “오크통 숙성 증류주는 나오자 마자 완판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충북 충주의 우리 술 양조장인 다농바이오는 오크통을 이용해 증류주를 숙성한다. 사진은 다농바이오 오크통을 모아 놓은 창고 모습./충주=이종현 기자

한경자 다농바이오 대표는 “우리 술에 가장 적합한 오크통을 찾기 위해 다양한 오크통에 술을 숙성하고, 오크통을 그을리는 토스팅(tosating)이나 굽는 차링(charring)의 강도를 다르게 하는 등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며 “처음 들여온 오크통 200개 중에 40개는 제대로 숙성이 되지 않아서 술을 모두 버린 적도 있지만, 모두가 공부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끊임 없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농바이오는 10월까지 추가로 150개의 오크통을 들여올 계획이다. 오크통에 숙성한 증류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오크통을 확보한 것이다. 장보아 팀장은 “한국에서 좋은 오크통을 구할 수 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한국산 오크통에 술을 숙성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산 오크통이 실제 우리 술을 만드는 양조장에 더 많이 공급되기 위해서는 한국식품연구원의 ‘전통 증류주 현대화’ 프로젝트가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한국산 오크통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상업화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후속 연구 과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탓에 6년 동안 연구한 한국산 오크통이 이대로 사장될 상황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이번 연구 과제를 진행하면서 스코틀랜드 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늘 쓰던 오크통이 아닌 새로운 지역의 새로운 오크통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한국산 오크통이 산업화까지 이어진다면 전 세계 위스키 업계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 충주의 우리 술 양조장인 다농바이오는 오크통에 숙성한 증류주 '낫포세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증류주 원주와 다양한 오크통에 숙성한 낫포세일 제품들./충주=이종현 기자

참고 자료

Foods(2020), DOI : https://doi.org/10.3390/foods910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