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양궁협회장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작년 12월 1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한국 양궁 60주년 기념행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뉴스1

한국 양국이 2024 파리올림픽에서 다시 한 번 금메달을 정조준하고 있다. 남·녀 단체전을 석권한 데 이어 개인전에서도 금메달 사냥에 나섰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호성적을 거두자 40년에 걸쳐 양국 대표팀을 후원한 현대차그룹에도 관심이 쏠린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1985년부터 양궁 대표팀을 지원하고 있다.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 한 게 아니다.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역량을 총동원해 과학기술로 양궁 대표팀의 훈련을 돕고 있다.

◇슈팅 머신으로 경기력 끌어려

현대차그룹은 파리올림픽 개막을 앞둔 지난 7월 23일 양궁용 슈팅 머신 두 가지를 공개했다. 고품질의 화살을 골라내는 고정밀 슈팅 머신과 개인 훈련용 슈팅 로봇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개발한 양궁용 고정밀 슈팅 머신은 선수의 슈팅 스타일이나 신체 비율에 따라 화살의 각도와 높이, 방향을 모방한다. 70m 거리에서도 과녁의 동일한 지점을 정확하게 맞춘다. 동력 장치인 액추에이터를 정밀하게 최적화한 결과다.

이 슈팅 머신은 대회에 사용할 최상의 화살을 골라내는 데 사용한다. 한 번에 화살을 24개 발사하고 결함이 있는 10%는 걸러낸다. 경기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오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활의 상태를 살필 수도 있다. 활을 일정 길이 단위로 당기면서 활의 세기를 측정해 이상 징후를 미리 포착한다.

개인 훈련용 슈팅 로봇은 선수들이 실제 경기에서 다른 선수와 경쟁하는 듯한 상황을 재현한다. 로봇은 주변 바람과 성적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화살이 정중앙에 맞도록 조정한다. 마치 토너먼트를 치르듯이 로봇과 일대일로 경쟁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두 슈팅 머신은 정밀한 로봇 제어 기술에 대한 노력을 보여준다”며 “같은 기술로 전기차를 자동으로 충전하는 자동 충전 로봇을 개발한 바 있다”고 밝혔다.

선수 맞춤형 화살을 검사하고 불량 화살을 선별할 수 있는 고정밀 슈팅 머신./현대자동차그룹 홈페이지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한 맞춤형 그립과 장비

훈련만큼이나 장비도 중요하다. 장비 상태에 따라 경기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탁구 남자 단식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왕추친이 파리올림픽 단식 32강에서 탈락한 이유가 전날 탁구채가 부러진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왕추친은 직접적인 패배의 이유는 아니지만 기분에는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한국 양궁 대표팀은 장비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2018년부터 3D(입체) 프린팅 기술로 맞춤형 그립을 개발해 왔다. 그립은 활 핸들의 손잡이 부분으로, 활을 사용할 때마다 충격을 받아 자주 교체해 줘야 한다. 하지만 그립을 교체할 경우 길들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선수 개개인에 맞춰 3D 프린팅으로 맞춤형 그립을 제작한다.

컴퓨터 설게도에 따라 프린터로 재료를 뿌려 층층이 쌓아 입체를 만드는 것이다. 기존 그립을 레이저로 스캔해 컴퓨터에 구현하고 그대로 프린터가 만들기 때문에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선수에 따라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 올림픽에 한국 대표팀 코치로 나선 임동현 코치는 세계양궁협회에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립에서 일부 재료를 제거하거나 추가하는 실험을 한 다음 최적화된 그립을 스캔해서 3D 인쇄한다”며 “남자팀은 모두 맞춤형 그립을 사용하고, 여자팀은 일부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양궁협회는 홈페이지에서 “한국 양궁 대표팀은 스포츠의 모든 측면을 살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며 “과학적이고 반복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이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현대차그룹 양궁 체험행사장에 전시된 선수 맞춤형 3D 그립./연합뉴스

◇“한국 따라가자” 세계 각국의 심리 훈련

한국이라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계 각국도 노력하고 있다. 네덜란드 양궁팀은 알파비츠(Alphabeats)라는 두뇌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해 양궁 선수들의 심리적 준비를 도왔다. 알파비츠는 명상 상태나 깊은 집중력을 유도하는 알파 뇌파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다.

선수들은 알파비츠의 헤드밴드를 착용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인지 게임을 수행해 알파 뇌파를 높이는 훈련을 했다. 자연스레 경기 중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높은 집중력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 전체 선수 중 75%가 알파 뇌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캐나다 소재 회사인 코어 인터페이스와 함께 경기 동안 뇌 활동을 실시간으로 시각화하는 앱(app, 응용프로그램)인 ‘힛 더 골드(Hit the Gold)’를 개발했다. 게임하듯 컴퓨터로 양궁 경기를 시뮬레이션(가상 실험)하면 앱이 뇌파 기록을 해석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파악한다.

힛 더 골드는 토너먼트 모드도 갖추고 있다. 앱을 사용하는 선수는 컴퓨터로 생성된 다른 선수의 점수에 맞서 화살을 쏜다. 경쟁의 압박감을 미리 경험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개발에 참여한 도마고이 부덴 크로아티아 양궁 선수는 앱을 사용해 세계 양궁 랭킹을 30계단 올려 6위에 오르기도 했다.

코어 인터페이스 연구진은 앱 공개 당시 “뇌는 운동 성능의 핵심으로, 양궁 선수들은 정신 상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며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선수와 코치들이 협업 요청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