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위기 의식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는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최근에는 테무나 알리처럼 전자상거래 유통망까지 갖추면서 한국 소비자를 직접 공략하고 있다. 선진국도 달라졌다. 미국은 한 때 정보통신기술(ICT)과 금융,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면서 제조업을 등한시했지만. 요즘은 해외에 진출한 제조 기업을 국내로 되돌리는 리쇼어링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후보 수락 연설에서 "다른 나라들이 우리 일자리를 뺏어가고 우리를 약탈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에서 상품을 팔고 싶다면 미국에서만 만들면 된다"고 선언했다. 독일과 일본 같은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들도 저마다 새로운 제조업 정책을 세우며 중국의 성장과 미국의 반격에 대응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제조업은 제자리 걸음은커녕 뒷걸음질 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5~27% 수준에서 그치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내림세다. 58만여 제조업 기업 중 직원이 20인 이하인 기업이 95%를 차지한다. 200인 이상 기업은 단 1500개로 0.25%에 불과한 상황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속에 청년층이 제조업 일자리를 외면하면서 새로운 혁신을 시도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달 경기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의 사망자 23명 중 18명이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제조업이 처한 노동력 공급 부족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조선비즈는 한국 제조업의 위기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한국기술센터에서 국내 제조업 분야 최고 전문가를 한 자리에 모아 좌담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장, 장웅성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 단장, 이상목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한국생산기술연구원

조선비즈는 한국 제조업의 위기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한국기술센터에서 제조업 분야 최고 전문가 세 명을 모아 좌담회를 진행했다. 사회는 이종현 기자가 맡았다. 장웅성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 단장과 이상목 한국생산기술연구원(생기원) 원장,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장은 지난달 한국공학한림원이 주최한 포럼에서 가치(Value)와 제조업(Manufacture)을 합친 '밸류팩처'라는 개념을 제조업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장 단장은 포항산업과학연구원 용접센터장을 지내고 대한용접접학학회 회장, 인하대 융합혁신기술원 원장, 한국공학한림원 포럼운영위원장, 국가첨단전략산업 전문위원 조정위원을 지냈다. 이 원장은 24년 동안 생기원에서 뿌리기술인 소재·부품·장비 업무를 맡았으며, 정 본부장은 국내 산업 정책 분야 싱크탱크인 산업연구원에서 제조업 전문가로 통한다.

◇WTO 황태자였던 한국, 질서 변화에 외톨이

–한국 제조업의 위기라는 진단에 동의하나.

장웅성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 단장(이하 장웅성) : "최근 접한 뉴스 중에 세 가지 정도가 한국 제조업의 위기를 보여준다. 우선 한국이 첨단산업 공장 수출에서 세계 1위라는 뉴스다. 제조업이 잘 돌아가는 나라면 공장을 외국에 수출할 필요가 없다. 둘째는 한국 중소기업 생산성이 대기업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다. 마지막은 '차이나 인사이드'라는 단어였는데, 한국 제품에 중국산 중간재가 들어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선박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90%는 한국산 철강을 썼다면 이제는 한국산은 70%로 줄고 빈 자리를 중국산이 채우고 있다. 중국의 약진이 기술과 시장, 생태계 모든 면에서 한국 제조업의 위기 신호라고 생각한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장(이하 정은미) : "우리 제조업이 1980년대까지는 고도성장을 이어왔고, 2000년대까지는 성장률이 낮아졌지만 괜찮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때 구조 고도화를 하지 못했고, 정밀기계나 소재, 로봇 같은 새로운 성장 산업이 나타나지 않은 채 기존 주력 산업의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는 그 대안이었지만, 설비와 설계 기술이 사실은 다 외국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우리의 경쟁력을 어디에서 찾을 지에 대한 고민이 위기감을 갖는 요인이 됐다고 본다."

이상목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이하 이상목) : "한국은 58만개 제조 기업 중 직원이 200명 이상인 기업은 1500개, 0.25%에 불과하다. 독일만 해도 직원 600명 이상 기업이 2000개는 있다. 그런데 한국은 작은 기업이 더 작아진다. 노무관리 인력만 뽑아서 분사하다보니 직원이 7~8명만 있는 기업들이 많다. 기업이 작아지다보니 중소기업은 완제품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고,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거나 설계할 권한도 없다. 부가가치는 그런 부분에서 나오는데 이런 부가가치를 따먹기 어려운 구조다. 그렇다보니 젊은 층이 제조업을 외면하는 악순환이다. 디지털 전환(DX)과 녹색 전환(GX)이 중요해졌지만, 작은 제조 기업에서는 이런 전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혁신 성장의 동력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지난 5월 16일 인천 중구 인천공항본부세관 특송물류센터에서 관계자들이 중국에서 들어온 물품을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제조업 강국이었던 미국과 독일, 일본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장웅성 : "중국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다. 중국이 2045년에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1등이 되겠다는 '제조 2025′를 발표했고, 실제로 중국 제조업이 세계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독일이나 미국 같은 국가들이 위기 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과거 제조현장을 세계 공장 개념으로 바꾸면서 자국 제조업을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제조업이 혁신 동력이라는 기조 아래 제조업 부활에 나서고 있다. 단순히 공장만 짓는 게 아니라 플랫폼과 네트워크, 제조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접목하고 있다. 나무를 잘 키우는 게 아니라 숲 전체를 다시 가꾸는 전략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상목 : "과거에 미국의 혁신적인 연구개발(R&D) 투자는 에너지부(DOE)가 이끌었는데 최근 들어 국방부(DOD)가 움직이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뿌리기술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생기원을 찾아왔다. DOD가 제조업이 발전하지 않은 지역에 7억 5000만달러(약 1조 300억원) 규모의 뿌리기술 R&D 과제를 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주조, 금형, 열처리 같은 기술들이다.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뿌리기술에 다시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정은미 : "독일이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내세운 '인더스트리 4.0′의 시발점도 중국이었다. 독일은 전기, 기계, 전자 산업을 이끌었는데 어느 순간 중국이 기계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장비시장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다. 해결책으로 전기와 전자가 합쳐진 프리미엄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 개념이 디지털 전환으로 이어졌다. 기계를 운영할 수 있는 노하우, 데이터, 소프트웨어, 솔루션까지 기계와 연결이 되는 전략으로 간 것이다. 독일과 일본이 내세우는 디지털 전환은 중국이 추격 불가능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장웅성 :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전까지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체제에서 거의 황태자와 같은 지위를 누렸다. 대기업 중심의 소품종 대량 생산 체제만으로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국제 질서가 변하면서 우리의 현주소, 경쟁력의 수준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지, 아니면 여기에서 추락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22년 12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린 TSMC 공장 착공식에서 모리스 창(오른쪽 세번째) TSMC 창업자와 팀 쿡 애플 CEO, 류더인 TSMC 전 회장, 웨이저자 TSMC 회장 등이 축배를 들고 있다./블룸버그

◇테무와 가격 경쟁 불가능, 가치 높여야 생존

–한국공학한림원 IS4T 포럼에서 '밸류팩처'라는 대안이 나왔다.

이상목 : "지금까지는 매뉴팩처링(manufacturing)의 시대였다. 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생산성 고도화를 위해서는 제품의 개인화를 버려야 했다. 우리가 2차, 3차,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붙인 말들도 정확하게는 제조 기술의 혁명이었고, 생산성을 더 높이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지난 260년 동안 생산성에 집중했는데, 최근 들어 중국을 중심으로 개발도상국의 저가 대량 생산 시장이 다시 열리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는 경쟁이 안 된다. 우리가 테무와 가격 경쟁을 할 수는 없는 셈이다. 한국 제조업은 대량생산에 집중하는 매뉴팩처링 대신 제품의 가치를 높이고, 동시에 제조 기업도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생산시스템을 혁신하는 길로 가야 한다. 그 방안을 밸류팩처링이라는 개념으로 제안한 것이다."

장웅성 : "밸류팩처링이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실천하는 기업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스마트폰을 만들지만 애플의 시가총액은 4777조2853억으로 삼성전자(496조6859억원)의 10배이다. 테슬라를 아무도 자동차 제조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으로 여긴다. 애플과 테슬라가 보여주는 게 밸류팩처링이다. 이런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조선업이 강하지만, 해외에서는 조선업체가 인증이나 설계, 오랫동안 축적한 데이터를 이용해 온갖 비즈니스를 한다. 이렇게 제조업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가치를 높이고 시장을 넓히는 게 밸류팩처링이다."

정은미 :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제조업을 하지 말고 서비스업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제조업 자체의 가치를 높이자는 의미다.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그치지 않고 내재화된 가치에 주목하자는 이야기다. 제조의 가치를 높이면 생산 시설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자연스럽게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스마트 공장을 도입한다고 하면 일자리가 사라질까 우려하지만, 독일을 보면 기존에 생산 직원을 검수나 기획 같은 다른 업무로 돌려서 생산성을 높이면서 일자리도 유지한다."

전문가들은 한국 제조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도전적이고 유연한 R&D 투자와 중소기업의 원가 혁신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은 핵심 밴더 중소기업과 함께 자율제조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왼쪽부터 장웅성 산업통상자원 R&D전략기획단 단장, 이상목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장./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제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나 정책은.

이상목 : "기술 함대를 육성해야 한다. 함대를 보면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서 순양함과 구축함 초계기, 잠수함이 하나의 함대를 이뤄서 움직인다. 우리 제조업도 마찬가지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대기업은 기업 간 데이터를 공유하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제조(Software Defined Manufacturing, SDM)'로 움직여야 한다. 자율제조 마더팩토리가 대기업 생산의 중심이 되고, 그 밑에 3만개 정도 대기업 핵심 밴더 중소기업에 기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함께 함대에 편입해 혁신을 이끄는 역할이다. 나머지 55만개 중소기업은 원가 절감 시스템을 통해 생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와 지자체, 대학, 연구기관이 중소기업의 원가혁신을 돕겠지만, 기업들 스스로 노력이 필요하다. 함대를 꾸리는 데 나룻배와 쪽배가 같이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웅성 : "중소기업과 관련된 한국 정부 예산이 전체 지출의 5.1%에 달한다. 연구개발(R&D) 투자만큼 많다. OECD는 한국의 중소기업 정책에 대해 너무 많은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이것저것 해보는 게 아니라 제조업 정책의 '그랜드 디자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 역할이 중요한데 개별 업종 단위의 접근법은 잘못이다. 나무 하나를 살리겠다고 해서는 숲을 보지 못한다. 독일처럼 정부가 나서서 10년, 15년씩 꾸준하게 정책을 이끌고 가야 한다. 개별 기관이나 기업이 성공 사례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의 제조 중소기업 지원이 성공을 거두면 다른 기관이나 기업들도 경쟁하듯 더 노력할 것이다."

–생기원에서는 제조업 육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이상목 : "생기원에 10개 지역 본부가 있고 그 밑에 센터들이 있다. 지금 지역 자체가 소멸되는 곳이 많은데 생기원이 역할을 해보자고 해서 그 지역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수행하는 메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지역 본부 10곳 중 5곳은 이미 펀딩을 마쳤다. 올해 안에 나머지 5곳도 마무리해서 지역에 어울리는 산업을 육성해보려고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에 청년들이 와서 일하고 싶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이외에도 자율제조 공급망 대응 기술, 탄소·수소 통합 시스템 등 제조업 혁신을 위한 여러 연구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중소기업 제조 현장을 지능형 공장으로 고도화하는 '스마트공장 3.0' 사업을 하고 있다. 2023년부터 매년 100억원씩 3년간 총 300억원을 투자해 600개 중소기업에 스마트공장 구축·고도화를 지원한다. 사진은 충남 아산 비데 전문기업 '에이스라이프'의 도기 일체형 비데 제조라인에서 직원들이 작업하는 모습./삼성전자

–밸류팩처링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정책으로 만들 방안이 있나.

정은미 : "인터넷은 소비자를 변화시켰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기호를 드러내고, 그 기호에 맞는 제품을 인터넷에서 고를 수 있다. 디지털 전환 같은 기술의 발전은 이런 소비자의 기호에 맞춤형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걸 가능하게 해준다. 과거에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고비용을 의미했다면, 디지털 전환 덕분에 비용을 줄이면서도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 디지털 전환 같은 제조업의 혁신은 중소기업 입장에서도 새로운 기회다. 테무 같은 서비스가 인기를 얻듯이 이런 변화를 중소기업도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성장의 기회가 있다."

이상목 : "청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제조업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청년들과 이야기 나눠보면 좋고 싫은 게 명확하다. 과거에는 애국심, 조직에 대한 충성에 호소했다면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

장웅성 : "제조업이 밸류팩처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밸류팩처가 되기 위해서는 공공 영역의 R&D를 통해 부가가치가 굉장히 높은 대체 불가능한 기술과 서비스가 나와야 한다. R&D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도전적인 R&D가 허용돼야 한다. 또 하나 풀어야 할 문제는 부처간 장벽을 없애는 일이다. 밸류팩처링을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합, 업종별, 산업별 합종연횡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R&D 체계는 부처별로 나뉘어져 있고, 부처 안에서도 사업별로 칸막이가 많다. 이런 경직된 부분을 풀고 유연한 구조를 만드는 게 풀어야 할 과제다."

참고 자료

OECD Economic Surveys: Korea(2024), DOI : https://doi.org/10.1787/c243e16a-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