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당신이 입는 옷은 당신이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패션이 단순한 옷 기능을 넘어 개인의 개성을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초기 인류는 달랐다. 자연의 위협과 극한 추위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보호막에 불과했다. 과연 인류는 언제부터 자신을 드러낼 목적으로 옷을 입었을까.
미국 시카고대 고고학과 이언 길리건 교수 연구진은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한 리뷰 논문에서 “4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 등장한 실구멍이 있는 바늘(eyed needles) 덕분에 옷이 단순히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바늘은 아주 작은 바늘귀(바늘구멍)에 실을 꿰어 옷감을 꿰매는 데 쓰인다. 섬세하게 바느질을 할 수 있어 천을 꿰매는 것은 물론 각종 문양을 넣을 수 있다. 길리건 교수는 “구멍이 있는 바늘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더 섬세하게 바느질을 할 수 있었다”며 “이때부터 옷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필수품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바늘귀 덕분에 여러 겹 옷이나 장식 가능
인류가 처음 옷을 입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부터 17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미국 연구진은 지난 2011년 현생인류에 기생하는 이의 유전자(DNA)를 연구한 결과 사람의 머릿니에서 몸니가 분화한 시기가 17만년 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처음에 이는 머리카락이 있는 머리에만 살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몸에 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17만년 전 몸니가 생긴 것은 인간의 몸에 털 역할을 한 옷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생인류 조상은 약 10만년 전 더 추운 고위도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보다 7만년 전에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옷은 자연의 위협에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는 수단에 머물렀다. 인류 조상들은 초창기 옷을 만드는 데 동물의 뼈나 이빨을 바늘 대용으로 썼다. 바늘처럼 사용하던 송곳 모양의 뼈는 구멍이 있는 바늘이 발견되기 훨씬 전인 약 8만년 전 아프리카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만 해도 뼈송곳으로 옷을 만들려면 두 가지 공정을 거쳐야 했다. 송곳으로 먼저 가죽에 구멍을 뚫고, 그 다음 구멍에 힘줄로 된 실을 꿰는 것이다.
길리건 교수는 실을 꿰는 구멍이 있는 바늘은 한참 뒤인 4만년 전 시베리아 지역에 처음 등장했다고 밝혓다. 연구진에 따르면 새롭게 등장한 바늘은 구멍을 뚫고 실을 꿰는 기능이 하나여서 더 섬세한 바느질이 가능했다. 특히 여러 겹의 옷을 짓거나 섬세한 장식을 옷에 넣는 데 요긴했다. 연구진은 “구멍이 있는 바늘은 더 정교하고 복잡한 옷이 필요하고 옷에도 장식을 넣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추위 견디는 속옷, 옷장식 등장에 기여
연구진은 바늘이 발달한 배경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바늘귀가 등장한 약 4만년 전은 마지막 빙하기여서 두꺼운 옷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보다 여러 겹의 옷이 필요해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길리건 교수는 “당시 인류의 조상들이 속옷을 처음 발명했는데 더 섬세한 재봉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실구멍이 있는 바늘이 더 섬세하고 효율적인 재봉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또 추위와 별도의 문화적 의미가 이때부터 생겨나면서 바늘이 발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멍이 있는 바늘이 장신구 역할을 하던 구슬과 조개로 옷을 꾸미는 데 유용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인류 조상들은 10만년 전부터 구멍 뚫린 조개껍데기를 장신구로 썼다고 추정된다. 약 3만~4만년 전부터는 구슬도 사용되기 시작됐다. 연구진은 출토된 구슬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으로 미뤄보면 구슬로 옷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5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200㎞ 떨어진 블라디미르시 외곽에서 발견된 순기르 유적지에선 3만~4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과 매머드뼈, 장신구 등이 대거 발견됐다. 무덤 중 하나에는 10세 정도 소녀와 13세 정도 소년의 유해가 있었는데 옷가지와 함께 상아 구슬을 포함한 정교한 장신구가 발견됐다. 발견 당시 구슬 장식들은 옷에 달려 있던 것과 유사한 형태로 발견됐다.
연구진은 추운 기후가 의복의 발달을 촉진한 점도 있지만 문화적 이유로도 옷차림이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길리건 교수는 “실제로 많은 비문명 부족들은 바디 페인팅, 흉터화, 문신으로 몸을 장식하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몸 대신 옷으로 옮겨갔다”며 “마지막 빙하기 후반 유라시아의 추운 지역에서는 바디 페인팅이나 의도적인 흉터화와 같은 전통적인 신체 장식 방법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옷 스타일로 공동체 의식 높여
구멍이 있는 바늘은 선사시대 문명이 있던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체코와 프랑스, 노르웨이, 중국 과학자들로 구성된 연구진은 지난 2018년 국제 학술지 ‘인간진화’에 전 세계에서 수집한 선사시대 바늘 유물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북반구에서 발견된 구멍이 있는 바늘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가 구석기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연구자들은 지금의 시베리아와 중국에서는 4만 5000년 전에 눈 달린 바늘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럽에서는 약 2만 6000년 전 바늘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와이오밍 동부와 워싱턴 중부의 유적지에서 1만 3000년 된 정교한 바늘을 발견했다. 중국 북부 사막에서는 1만년 이상 된 바늘과 바늘을 제작하는 도구들이 발견됐다.
옷은 인류 조상들에게 체온 유지 용도만 있었던 게 아니다. 과학자들은 귀달린 바늘로 따뜻한 옷을 만들면서 더 추운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같은 옷 스타일과 상징을 기반으로 공동체 의식을 높이며 더 크고 복잡한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
참고 자료
Science Advances (2024), DOI: https://doi.org/10.1126/sciadv.adp2887
Journal of Human Evolution(2018), DOI : https://doi.org/10.1016/j.jhevol.2018.1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