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가이자 수학자인 제임스 사이먼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 창립자가 2005년 자신의 뉴욕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부를 쌓은 후 미국 최대의 자선가 중 한 명이 됐다. /AP 연합뉴스

미국 과학계가 지난 10일(현지 시각) 폐암 투병 끝에 86세로 별세한 제임스 사이먼스(James Simons)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 창업자를 재조명하고 있다. 수학자 출신인 사이먼스는 수학과 통계를 기반으로 투자하는 퀀트Quant) 투자로 막대한 돈을 끌어모은 인물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경제지들은 사이먼스가 타계하자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천재 수학자’, ‘혁명적 투자가’, ‘퀀트 투자 창시자’로 평가했다.

하지만 과학계는 수학과 기초과학, 의학 연구를 물심양면 후원한 그를 ‘과학을 사랑한 기부왕’으로 평가한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사이먼스는 아내 마릴린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고 수십 년에 걸쳐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 컴퓨터 과학, 신경과학 분야의 기초 연구와 교육프로그램, 인도주의적 활동에 수십억 달러를 지원했다.

사이먼스는 원래 성공한 수학자였다. 1938년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사이먼스는 1958년 매사추세츠 공대(MIT) 수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고 국가안보국 산하 국방분석연구소에서 암호해독가로 활약했다. 1968년 베트남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고 해고되자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로 자리를 옮겨 수학과 학과장을 맡았다. 당시 그가 발표한 ‘천-사이먼스 이론’과 같은 수학적 성과는 지금도 끈 이론과 위상수학, 응집 물질 물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제임스 사이먼스 창립자가 2007년 뉴욕에서 인터뷰 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사이먼스는 수학 연구를 하면서도 늘 비즈니스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졸업 전 모터 스쿠터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다가 콜롬비아에서 타일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1978년 대학을 떠나 수학을 활용한 문제해결 방식인 알고리즘에 기반을 둔 투자회사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를 설립했다.

그는 금융가나 경영학 석사(MBA) 출신 대신 과학자들을 고용해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르네상스는 1988년 대표 펀드인 ‘메달리언’을 출시해 시장 평균 수익의 3배에 이르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주가 변동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작은 요소들을 재빨리 포착해 빠르게 주식을 사고 파는 방식을 적용한 덕분이었다.

오랜 동료였던 앤서니 필립스(Anthony Phillips) 스토니브룩대 수학과 명예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사이먼스는 비즈니스와 투자의 세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며 “그가 기업을 설립한 일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포브스는 사망 당시 사이먼스가 소유한 지분의 가치가 약 310억달러(약 41조174억원)에 이른다고 평가했다.

사이먼스는 그렇게 번 돈을 다시 과학과 수학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스토니브룩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아내 마릴린과 함께 1994년 뉴욕에 사이먼스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지난해 기준 40억달러(5조4232억원)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재단은 수학과 기초과학을 연구자와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지만, 1년에 두 번 재단 학술행사에 참여하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을 달지 않는다.

재단은 수학과 양자물리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신경과학 분야에서 계산과학을 활용하는 플랫아이언 연구소도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데이터 분석과 이론,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학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단은 2011년부터 과학 논문 사전공개 사이트인 아카이브(arXiv)도 지원하고 있다. 2020년에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건설한 사이먼스 천문대에 4000만달러(542억원)를 기부했다. 이곳에 설치된 마이크로파 탐지기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Big Bang, 대폭발) 직후의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제임스 사이먼스 르네상스테크놀로지스 창립자와 부인 마릴린 사이먼스 전 사이먼스재단 이사장(오른쪽부터)이 칠레 아타카마에 설립된 사이먼스 천문대 기공식에 참석해 연구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사이먼스는 수학과 과학 교육 분야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사이먼스 재단은 뉴욕시 공립학교의 수학 교사 채용 프로그램인 ‘미국을 위한 수학(Math for America)’을 설립했다. 지난해에는 스토니브룩대에 대학 기부금으로 사상 최대 규모인 5억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재단은 또 과학잡지 두 곳에도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신경과학 전문지인 ‘더 트랜스미터’와 2022년 퓰리처상을 받은 기초과학 전문지인 ‘퀀타 매거진’이다.

그는 슬픈 가족사를 기부라는 방식으로 승화시켰다. 10년 간격으로 자전거 사고와 익사 사고로 두 아들을 잃자 아들들의 이름으로 자선 단체 두 곳에 자금을 지원했다. 각각 네팔 개발과 뉴욕주 자연보호구역을 조성하는 단체들이다

사이먼스 회장 부부에게는 아픈 손가락도 있다. 여섯 살 때 자폐 진단을 받은 딸이다. 그 영향으로 2005년과 2011년 스토니브룩대와 MIT에 각각 1100만달러와 2650만달러를 자폐증 연구에 써달라고 기부하기도 했다. 더 트랜스미터를 지원하기 전에는 자폐증 연구 간행물인 스펙트럼을 후원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뇌 신경과학자인 글로리아 최 MIT 교수는 지난해 방한해 조선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사이먼스 재단으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지원을 받은 것이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면역 체계가 뇌에 영향을 미쳐 자폐가 발생할 수 있음을 세계 최초로 확인해 자폐 치료에 전기를 마련했다.

사이먼스가 과학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는 2017년 버뮤다에 있는 역외 펀드에 80억달러를 세금을 내지 않고 숨겨둔 혐의로 비난을 받았다. 당시 그는 “자선 사업을 위한 자금이었다”고 해명했다. 2021년에는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 임원들이 거래 이익을 남기며 납세 의무를 부당하게 회피한 혐의로 미 국세청(IRS)에 70억달러를 추징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사이언스지는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그를 자선 활동과 과학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란 유산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라딥 코슬라(Pradeep Khosla.)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총장은 대학 홈페이지에 올린 추도사에서 “사이먼스가 학계, 금융산업, 자선사업 분야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선구적인 관대함은 우리가 우주를 더 잘 이해하고 의학, 공학 등의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됐다”며 “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을 남겼다”고 애도했다.

미국 과학 후원기관인 카네기 사이언스의 에릭 아이삭(Eric Isaacs) 대표도 홈페이지 추도사에서 “과학과 사회에 대한 사이먼스의 공헌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며 “그는 유서 깊은 경력을 통해 수학, 물리학, 투자 및 자선 활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천체물리학자 출신의 데이비드 스퍼겔(David Spergel) 사이먼스스 재단 이사장은 사이언스에 “사이먼스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가 사이먼스 천문대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는 것”이라며 “첫 결과를 보고는 몇 주 안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스퍼겔 이사장은 “사이먼스 창립자의 사후에도 재단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제임스 사이먼스 르네상스테크놀로지 창업자가 미국 뉴욕의 플랫아이언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플랫아이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