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대 입자 물리학 연구소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비회원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고에너지 연구 분야에서 유럽이나 미국 같은 국가에 기술적으로 뒤처진 건 아니다. 오히려 유럽과 별개로 자신들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지난 2016년 중국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IHEP)는 CERN의 차세대 원형 입자가속기(FCC)에 필적하는 차세대 강입자가속기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발표 당시를 기준으로도 3조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IHEP는 이렇게 구축한 입자가속기들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참 쿼크와 타우 렙톤에 대한 첨단 실험을 이끌고 있다. 이제 고에너지 분야의 연구개발(R&D)에서 중국은 빠질 수 없는 국가가 됐다.
CERN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CERN 같은 해외연구기관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개별 대학 연구자의 공동 연구를 지원하는 형태라면, 유럽이나 미국, 중국, 일본 같은 과학 선진국은 국가 차원의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연구네트워크를 구성한다”며 “한국도 중국처럼 국가 연구시설을 만들어 국제협력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어땋게 고에너지 물리 분야의 강국으로 자리잡은 걸까. 국내 고에너지 분야 연구자들은 중국의 성장 비결로 일찌감치 국가 차원의 국제적인 연구네트워크를 구성했다는 점을 꼽았다. 김태정 교수는 “한국의 연구자들도 개인적인 연구 역량은 뛰어난데, 각개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문제”라며 “고에너지 물리 분야의 연구자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비유하면 전 세계 고에너지 연구 분야에서 한국 연구자는 혼자 활동하는 용병 같다면, 미국이나 일본, 중국 같은 기술 선도국의 연구자들은 해당 국가의 고에너지물리 연구를 총괄하는 연구기관에 소속돼 하나의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대부분의 과학 선진국은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주도하는 국가 차원의 연구기관을 두고 있다. 중국은 1970년대부터 IHEP를 운영했고, 일본도 반 세기 전에 고에너지물리연구기구(KEK)를 만들었다. 입자가속기 연구의 선도국인 미국이나 유럽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고에너지 물리 분야를 이끄는 연구기관이 없다보니 작은 연구 과제 하나도 연구자가 직접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논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에서 진행되는 국제공동연구에 한국 연구자가 참여하려면 매번 과기정통부를 설득해 예산을 따내야 한다. 작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고에너지 물리 분야의 연구 예산을 매번 주무부처와 연구자가 일대일로 대화하며 결정해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김 교수는 “과기정통부도 컨트롤 타워(사령탑)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했지만, 담당 과장이 바뀌면서 논의가 다시 제자리걸음”이라며 “학계에서는 한국고에너지물리학회를 만들어서 목소리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과기정통부가 CERN 준회원국 가입을 추진하면서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이끌 기관은 더욱 절실해졌다. 준회원국 가입 절차가 본격화되면 국내 학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창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참고 : [단독] ‘神의 입자’ 밝힌 CERN서 역할 커진 한국...회원국 가입 첫 발 뗀다)
학계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운영하는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부지를 활용하면 고에너지 물리 연구기관을 세우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본다. 김 교수는 “국내 고에너지 물리 연구는 현재 서울의 고려대, 한양대 같은 대학과 대전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경북대 등에 분산돼 있다”며 “이런 연구설비와 연구자가 한 군데 모이면 시너지를 낼 수 있는데, 적당한 공간이 없어서 지금은 흩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대전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부지가 최적의 장소라며 과기정통부와 IBS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일본이 반세기 전에 KEK 같은 범국가적인 시설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했듯 우리도 이제라도 국내 고에너지 물리 연구 시설을 건립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