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의 김민지 연구원과 정소영 과장, 이혜연 학예연구사.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사무동에서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1997년 출토된 청동용을 살펴보고 있다. 정 과장은 "문화유산은 모든 사람이 즐기고 향유하는 공공자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김지호 기자

지난달 22일 오전 경복궁 남쪽 정문인 광화문에서 왼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하얀 천막이 쳐졌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서쪽 망루인 ‘서십자각(西十字閣)’이 있던 자리였다. 흰 천막 사이로는 흰 가운을 입은 15명의 연구원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경복궁 서쪽 영추문과 주변 담장을 더럽힌 스프레이 낙서를 지우기 위해 2차 복원 작업이 진행되는 현장이었다.

이날 경복궁 담벼락의 낙서를 지우는 작업에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의 정소영 과장과 이혜연 학예연구사, 김민지 연구원도 참여했다. 모두 문화재 보존 업무 경력이 짧게 8년, 길게 20년 된 베테랑 보존과학자들이다. 조선비즈는 지난달 25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과학자들을 만나 과학이 어떻게 문화재를 지키는지 물었다.

김민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이 지난달 22일 오전 경복궁 서쪽 담장의 오염물을 제거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도포한 뒤 젤란검을 부착하고 있다. 젤란검은 그동안 문화재 복원에 사용되지 않는 물질이었지만, 유물과학과 연구원들의 실험을 거쳐 경복궁 담장 복원에 적용됐다./송복규 기자

낙서와 방화 등으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은 과거부터 있었다. 2007년 삼전도비 스프레이 낙서 사건,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2011년 울산에 있는 국보 천전리 암각화 낙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때마다 보존과학자들이 나서 과학 지식을 토대로 훼손된 문화재를 긴급 복구했다.

경복궁의 담벼락을 복구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2007년 봄에 발생한 삼전도비 낙서 사건을 참고했지만, 이번에는 한겨울에 낙서를 지우려니 기존 흡착 방법을 쓰기 어려웠다. 이전에는 화학약품으로 물감을 녹여내고 수증기로 남은 물질을 씻어내는 방식으로 복원했다. 이번 경복궁 낙서 사건은 한겨울에 일어난 만큼 세척 도중에 수증기가 얼면 오염물이 석재 표면에 그대로 남는 문제가 있었다.

어려운 복구 과정에서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들의 전문성이 빛났다. 이번에는 삼전도비 낙서 복구 때와 달리 화학적 방법에 앞서 석재 표면과 강도가 다른 광물 입자를 쏴 오염물을 제거하는 ‘블라스팅(Blasting)’ 기법을 사용했다. 석재 문화재의 스프레이 낙서를 지우는 작업에 블라스팅 기법을 도입한 사례는 드물다.

연구진은 물리적으로 오염물을 한 번 벗겨낸 뒤 화학적 방법을 사용해 스프레이를 효율적으로 제거했다. 여기에 국내 최초로 ‘젤란검’을 사용했다. 젤란검은 당분 성분인 포도당과 글루콘산, 람노스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다당류 물질이다. 기존 오염물 흡착 작업에 활용했던 습포제보다 흡착력이 좋고 화학약품이나 오염물 같은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 장점이 있다. 잔여물이 없어 세척 작업도 필요하지 않아 수분이 석재 표면에 얼어붙을 일도 없다. 연구진은 해외에서 공공장소에 그려진 낙서 ‘그라피티’를 지울 때 젤란검을 사용한 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진들이 긴급 복구 처리한 경복궁 서쪽문. 표시된 부분이 스프레이 낙서가 있던 곳으로 1차 작업 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낙서는 모두 사라졌다./문화재청

이번에 첨단 보존기술이 총동원된 것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원들의 전문성 덕분이다. 예전엔 정 과장처럼 생물·화학 같은 기초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연구원으로 들어왔지만, 보존과학이 점차 전문 분야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보존과학 전공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금속과 목재, 도자, 유리, 가죽을 담당하는 연구원이 따로 있을 정도로 각자 높은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금속, 김 연구원은 유리·도자·옥석 문화재의 보존처리를 담당한다.

문화재를 지키는 데 첨단 과학장비들도 동원된다. 문화재를 보존 처리하거나 복원하다가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내부 구조를 알아야 한다. 이때 X선 촬영과 컴퓨터단층촬영(CT)을 진행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문화재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국내 박물관으로는 유일하게 배율이 높은 전계방사형 주사전자현미경(FESEM)도 보유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의 김민지 연구원과 정소영 과장, 이혜연 학예연구사.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사무동에서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1997년 출토된 청동용을 살펴보고 있다. 정 과장은 "보존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화학적 이해도"라고 말했다./김지호 기자

보존과학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학적 이해도’이다. 정 과장은 “문화재를 구성하는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는 게 필요해 화학적 지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보존과학은 기초과학 이론과 다른 분야에 활용되는 기술을 문화유산에 활용하는 것”이라며 “박물관의 소장품에 대한 분석과 조사, 연구가 보존의 기초가 된다”고 강조했다.

금속 문화재를 다루는 이 학예연구사도 정 과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흔히 금동 문화재는 청록색을 띠는 부분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긴 부식물”이라며 “부식 방지와 재질 강화, 주변 공기 차단, 보관 방법 모두 화학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관찰하면서 얻게 된 새로운 과학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것도 유물과학과 연구원들의 업무다. 김 연구원은 “경복궁 복원에는 문화재에 잘 사용되지 않았던 재료를 연구해 개발하고 적용했다”며 “이전까지 보존과학에 사용되지 않았던 과학적 정보와 다른 문화재 정보를 정량화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도 큰 부분”이라고 말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연구진이 복구한 경복궁 담장 모습. 위쪽이 경복궁 영추문, 아래쪽이 고궁박물관 부근 쪽문 벽돌을 복원한 것이다./문화재청

경복궁 담벼락 낙서 이후로도 멈추지 않은 문화재 훼손 사건에 문화재를 지키는 보존과학자들은 모두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근 성균관에서는 다른 낙서가 발견됐고, 한 남성이 창덕궁에 불을 붙이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정 과장은 “문화유산은 모든 사람이 즐기고 향유하는 자산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바라봐야 한다”며 “결국 공공의 자산인 문화재가 사적 재산 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경복궁 담장을 힘든 작업을 거쳐 복원에 성공했지만, 문화재는 인위적인 복원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며 “기껏해야 우리는 100년 사는데, 후대에 남겨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원도 “문화재는 한 번 손상되면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