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2조원에 달하는 바이오·헬스 분야의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편성 권한을 과학기술혁신본부에서 총리실 산하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로 옮기는 방안을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아직 실무진 사이에서 아이디어 차원으로 나온 이야기라고 하지만, 구체화될 경우 정부 R&D 예산의 판 자체가 달라질 수 있어 관가와 과학기술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6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바이오 분야 정부 R&D 예산 편성 권한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 대신 총리실 산하인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담당하는 방안을 놓고 정부 안팎에서 물밑 논의가 진행 중이다.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5월 초 국가재정전략회의 전에 결론을 내는 걸 목표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으로 안다”며 “과기정통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련 부처들은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로 이관하는 데 긍정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12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뉴스1

정부 R&D 예산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예산 배분과 조정을 맡고 있다. 매년 3월 투자방향이 나오고 이를 각 부처에 전달하면, 부처별로 5월까지 예산을 요구하게 된다. 이후 분야별 전문 위원회 검토를 거쳐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차년도 정부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올린다. 이후 정부 R&D 예산안이 확정되면 기획재정부가 전체 정부 예산안에 맞춰 세부 조정을 거친 뒤 국회로 보내게 된다. 올해는 국가재정전략회의가 5월 초로 예정돼 있어 작년보다 R&D 예산 편성 작업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지금 정부 내에서 검토되는 안은 바이오 분야 정부 R&D 예산은 분야별 전문 위원회 검토를 거쳐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아니라 총리실 산하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로 올려서 예산 배분·조정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전체 R&D 예산을 통으로 짜면 전문성이나 현장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문제 의식이 있다”며 “R&D 예산 편성 시 특정한 전문적인 분야는 시범적으로 혁신본부가 아닌 전문적인 기관이 맡아보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바이오도 검토 대상의 하나”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도 “최근 기술 발전이 워낙 빠르니 탄력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고, 바이오가 유력한 분야인 건 맞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바이오 R&D 예산 편성 권한을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로 옮기는 데 관련 부처들은 대부분 반색할 것이라고 본다. 예산 편성 권한을 뺏기는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만 반대할 뿐, 수조원대 예산 편성 권한을 가져오는 총리실이나 내심 과학기술혁신본부의 힘이 빠지길 바라는 기획재정부나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총리실 산하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바이오 업계의 입김이 강한 조직이라는 점이다.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는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비롯해 12명의 중앙행정 기관장과 민간위원 17명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올해 2월 새로 생긴 바이오헬스 분야의 범정부 컨트롤타워를 자임하고 있다. 특히 당연직으로 참여하는 중앙행정 기관장보다 민간위원들의 목소리가 큰 것으로 전해진다.

민간위원 중 바이오 업계에서는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이병건 지아이이노베이션 대표, 허은철 GC녹십자 대표, 황희 카카오헬스케어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학 병원장이나 보건산업진흥원장 등 바이오 업계와 밀접한 인사들이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이오 업계는 정부 R&D 예산이 신약 개발이나 임상 지원에 더 많이 투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제약사나 바이오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것보다는 기초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바이오헬스혁신위로 바이오 R&D 예산 편성 권한을 가져오자는 논의 자체도 이런 힘겨루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 R&D 지원이 줄어든 상황에서 기업 임상이나 신약 개발 같은 특정 사업에 R&D 예산 지원이 집중되면 기초연구 환경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게 과학기술계의 우려다. 한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기업의 입맛대로 정부 R&D 예산이 좌지우지되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기정통부는 정부 내부 실무진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이라 별도의 입장을 밝히기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분야를 떼어서 별도의 위원회에 R&D 배분·조정을 맡기는 건 전체 R&D 예산 편성의 일관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지금의 R&D 편성 과정은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최적의 시스템이라고 본다”며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정부 전체 R&D 예산 배분·조정을 관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